▲안익태 흉상.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있다.
김종성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만주 환상곡> 피날레가 4년 전 만든 <한국 환상곡>의 피날레와 똑같다는 점이다. <만주 환상곡> 제4악장을 이루는 두 부분이 <한국 환상곡> 마지막 악장을 이루는 세 부분 중 두 부분과 똑같았던 것.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음악학자 송병욱이 2007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 제27호에 기고한 '다시 보는 안익태- 애국가의 작곡가는 애국자였나'라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래의 <만주국 경축 음악>은 <만주 환상곡>과 같은 표현이다.
"<만주국 경축 음악>과 <한국 환상곡>은 주요 합창 선율 두 개를 공유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그 선율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과 신질서를 찬미하는 가사를 위해, 후자에서는 해방된 한국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사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안익태가 정말로 절절한 민족 사랑의 마음으로 <한국 환상곡>을 지었다면,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를 <한국 환상곡>의 피날레에서 가져다 쓰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애초 조선 찬미를 위해 창작한 선율을 한민족에게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던 제국주의자들의 정치 구호를 위해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송병욱은 말한다.
두 곡의 피날레가 같다는 것은, 두 곡을 지을 당시에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 환상곡>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음악가의 마음속에 들어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안익태를 옹호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환상곡>을 만든 1938년에 안익태가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면, 이 곡을 지을 당시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1938년에 그가 했던 또 다른 일은 위에서 이미 설명됐다. '덴노 환상곡'으로도 불릴 만한 <환상곡 에텐라쿠>를 바로 그 해에 만들었다. <환상곡 에텐라쿠>를 짓는 데 필요한 음악적 영감에 충만해 있었던 그 시기에 <한국 환상곡>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환상곡>과 <환상곡 에텐라쿠> 중 어느 쪽에 더 애착을 품었을까? 안익태가 어느 쪽에 애착을 더 가졌는지를 판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제 패망 뒤 그가 보여준 행동에서 너무도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언급됐듯이 <환상곡 에텐라쿠>는 "안익태가 역작으로 자부한" 작품이다. 일제 패망으로 '역작'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그는 이 곡에 '인공호흡'을 했다. 곡을 살리고자 제목을 바꾸었다.
"<에텐라쿠>로 알려진 이 작품은 1959년 <강천성악(降天聲樂)>으로 개작되었다." - <친일인명사전> 중
안익태는 해방 뒤에는 <환상곡 에텐라쿠> 연주를 더 이상 지휘하지 않았다. 대신, 1959년 이후로 <강천성악> 연주를 지휘했다. 만약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환상곡 에텐라쿠>를 억지로 만들었다면, 해방 뒤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예에 오점을 남길 수 있는 일을 감행한 것은 그가 그 곡에 고도의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명예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 곡을 지키고 싶었음을 뜻한다.
이는 <한국 환상곡>을 만든 1938년 그 해에 그가 천황 찬미를 위한 음악적 영감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황 찬미를 위한 음악적 열정에 빠져 있었던 그 해에, 다른 곡도 아니고 <한국 환상곡>을 지었다면, 민족에 대한 그의 태도가 꽤 불성실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