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제1회 인하공과대학 졸업식에서 한 졸업생이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인하’는 대학이 위치한 ‘인하’와 이승만 대통령이 지낸 ‘하와이’를 합해서 지은 이름이다.
국가기록원
문제는 대학 설립자들이 사기업처럼 운영하는 대학의 재원이 그들로부터 나온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대학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재단 출연금이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걷는 각종 명목의 돈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당시 대학은 학생으로부터 입학금과 수업료 외에 건축공사비를 징수했다. 학부모에게는 후원회를 조직해 후원회비를 내도록 했다. 그중 후원회비가 사립대학 재정의 절반을 차지했다.
대학 설립자가 자신의 땅에 건물만 짓고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걷은 돈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기생적인 풍토가 만연하자, 대학 설립이 가장 돈을 벌기 쉬운 투자라는 의미에서 '대학설립주식회사'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그렇게 대학을 세운 뒤 대학 설립자들은 학생 정원을 멋대로 늘리고 학사증을 팔면서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섰다. 국가 재원이 부족한 현실에서 교육열에 편승해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사립대학은 사유재산으로서 돈벌이 수단에 불과한 존재였다.
1961년에 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3년 6월에 사학의 공공성 제고를 내세우며 사립학교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대학 정원 조정을 근간으로 하는 대학 정비에는 실패했다. 사립대학들이 운영난을 운운하며 교원을 대량 해고하고 장학금을 축소하는 등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사립대학에 똬리를 튼 사학권력 앞에서는 군사정부조차 무력했던 셈이다.
대학 사유화의 산물, 사학비리의 등장
'사학비리'라는 말이 있다. 재벌처럼 한국적 현실에서 나온 부끄러운 개념이다. 해방 이후 대학교육의 첫 단추를 끼울 때부터 등장한 사학비리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만큼 사학권력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사학권력은 그들이 사유재산으로 여기는 대학에 대한 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 사학재단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며 대학을 통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립학교법이 개악되었다. 1981년 전두환 정부가 사학재단과 학교 경영을 분리하고자 개정했던 사립학교법을 뒤엎은 개악이었다.
우선 사학재단 이사장의 배우자, 형제자매, 자녀는 물론 사위와 며느리도 총·학장에 임명될 수 있도록 했다. 이사회의 친인척 비율도 기존의 3분의 1에서 5분의 2로 늘렸다. 총·학장 임면권은 물론 본래 총·학장이 갖고 있던 대학교수와 직원의 임면권까지 모두 사학재단에 넘어갔다. 어떻게 이런 퇴행이 가능했을까? 때마침 사립대학 이사장들의 조직인 한국대학법인협의회가 작성한 로비문서가 폭로되면서 여당과 야당 모두 로비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노태우 정부는 사립학교법 개악에 대해 사학의 자율성을 높이고자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설득력 없는 궤변에 불과했다. 그 무렵은 사학비리가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사립대학의 부동산 투기가 사회문제화되었고, 부정입학으로 재단 이사장, 총·학장, 보직 교수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무엇보다 부정입학사건의 파장은 충격적이었다. 서울대, 부산대와 같은 국립대는 물론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동국대와 같은 서울 소재 사립대학, 동아대, 영남대, 호남대 등 지방 소재 사립대학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부정입학사건이 터졌다.
그럼에도 사학비리는 근절되지 않았다. 족벌 경영과 전횡, 파행적인 학사운영, 학교의 사유재산화, 공금 유용과 횡령 등이 반복되었다. 여기에 1995년 5·31교육개혁으로 일정 여건만 갖추면 대학 설립을 허용하는 대학설립준칙주의가 도입되면서 부실 사학이 더욱 늘어났다. 이때부터 2000년까지 설립된 41개교 중 많은 사립대학의 교원 확보율, 교지 및 교사 확보율이 법정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사립대학들은 대학자율화의 명분을 업고 IMF 사태 이전에는 13% 이상씩, 2000년부터는 6% 이상씩 등록금을 올려 한국을 등록금이 가장 비싼 나라 중 하나로 만들었다.
'대학의 시장화'라는 철갑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