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배가 고팠던 아버지는 그렇게 삼 남매를 배불리 먹이는 가장이 됐다. (사진은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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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생 소년이던 아버지는 늘 배가 고팠다. 그 시절 모두가 그랬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내 자식들은 반드시 굶기지 않고 배 터지게 먹여야지.'
아버지는 예술적 재능이 있었지만 이를 살릴 만한 기회도, 여유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설움과 배고픔을 이겨내기에도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성인이 된 아버지는 자신의 꿈이나 삶보다는 가족들을 위해 직장에 매달렸다. 어쩌면 자신에게 성실한 직장인이 되는 것 외에 다른 재능이 있는지 평생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환경은 남들보다 힘들었지만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갔다. 늘 배가 고팠던 아버지는 그렇게 삼 남매를 배불리 먹이는 가장이 됐다.
아버지는 장남에 대한 기대가 몹시 컸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장남이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자신과 달리 장남만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양손 가득 책을 사 들고 집으로 왔다. 아버지의 장남은 밥만큼이나 책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장남이 판검사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장남인 나는 회사원으로 살아간다.
아버지는 일흔 살 생신 때, 우리 삼 남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내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너희들한테 해 준 게 하나도 없어서 참말로 미안하다. 그래도 이리 잘 커줘서 참말로 고맙데이. 이제 내 소원은 하나다. 그저 죽을 때 안 아프고 죽는 거. 그래야 너희들 고생 안 시키지."
아빠 냄새가 그리운 날
아버지는 자신의 마지막 인생 계획을 무사히 이루었다. 중환자실 한 번 들어가지 않고,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내가 회사 다니며 쓴 글을 모아 출간한 역사책을 들고 고향 집을 방문했다. 배고픈 소년이었던 아버지는 다시 그 시절 소년처럼 야윈 상태였다. 나는 그렇게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아들이 작가 됐다. 판검사보다 더 대단한 작가!"
나에게 글쓰기에 대한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DNA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음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도 아버지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면 서사를 가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둔갑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무심한 듯 던지는 유머는 좌중을 휘어잡았다. 스스로 '종환체'라 명명했던 붓글씨는 어린 내 눈에도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꾼의 재능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농담을 던지는 것에, 글씨의 재능은 제사를 지낼 때 지방 쓰는 것에 그쳤다.
아버지의 얇디얇은 월급봉투에서 사온 책이 없었다면, 나의 글쓰기 도전도 없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도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을까? 어쩌면 아버지도 글을 써보고 싶거나 그림을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걸까? 아버지도 나랑 같은 직장인이었는데 왜 그런 생각이 안 들었을까? 나는 무심한 자식일 뿐이다.
삼일장의 마지막 날, 어머니가 피를 토하듯 쏟아낸 말에 가족 모두가 오열했다.
"아이고 불쌍한 양반. 평생 단 한 번이라도 배부르게 못 먹고 이리 가노."
상대적으로 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엄마는 부부싸움 후에도 아버지 밥은 꼭 챙겨 드렸다. 아버지가 없을 때 우리 앞에서 아버지 흉을 보다가도 마지막 말은 정해져 있었다.
"너희 아버지는 못 먹은 게 한이 된 사람이라. 밉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