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독립운동 여성단체 근우회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22회] 여성계몽운동, 여성차별철폐 운동, 독립사상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해

등록 2019.02.23 14:01수정 2019.02.2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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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터 높이 솟아 있는 종로타워 뒤편에 있다. 지금은 '이문 설렁탕'집이다.
근우회 터높이 솟아 있는 종로타워 뒤편에 있다. 지금은 '이문 설렁탕'집이다.박금옥
3ㆍ1혁명 참여를 계기로 사회의식이 크게 고양된 여성들은 1919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초기에는 기독교 계열의 여성들이 각종 애국단체를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주요 여성단체의 결성을 보면 혈성단애국부인회(1919), 대한애국부인회(1919), 조선여자교육협회(1920), 경성여자청년회(1920), 기독교여자전도회(1921), 조선여자청년회(1922) 등을 꼽을 수 있다. 여성단체들은 야학운동과 계몽강연회 등을 통하여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으로 이끌었다. 

때마침 민족주의운동계열과 사회주의운동계열이 1927년 2월 대동단결을 다짐하면서 신간회를 창립한 것이 여성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성들은 1927년 1월 직업여성 친목단체로 활동하던 망월구락부가 창립 1주년 행사에서 "사교기관의 운동을 벗어나 의의 있는 활동"을 하기로 뜻을 모으고, 비슷한 시기에 재경 동경여자 유학생친목회가 조직되면서 여성단일당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몇 갈래로 추진되던 여성단체들은 1927년 4월 26일 서울에서 근우회(槿友會) 창립을 위해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발기인은 강정순ㆍ주세죽ㆍ허정숙ㆍ황신덕ㆍ차미리사ㆍ김활란ㆍ김은도ㆍ김일엽ㆍ김순복ㆍ유각경ㆍ길정희ㆍ정칠성ㆍ조원숙ㆍ최은희 등이다.
 
여성 독립 운동 알리는 플래시몹 배재고, 배화여고, 정신여고 학생들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시몹을 펼치고 있다. 이날 플래시몹을 기획한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전 민주당 의원)은 "요즘 학생들이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 말고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역사가 왜곡된 것이나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다"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 말씀처럼 올바른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대중화시키기 위해 플래시몹을 준비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여성 독립 운동 알리는 플래시몹배재고, 배화여고, 정신여고 학생들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시몹을 펼치고 있다. 이날 플래시몹을 기획한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전 민주당 의원)은 "요즘 학생들이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 말고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역사가 왜곡된 것이나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다"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 말씀처럼 올바른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대중화시키기 위해 플래시몹을 준비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유성호
사회운동가ㆍ여의사ㆍ교원ㆍ기자ㆍ종교인ㆍ문인ㆍ실업인 등 각계에서 활동한 15명을 발기인으로 선정하고 5월 27일 서울 YMCA 강당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이날 채택한 근우회 취지문이다.

                                          근우회 취지문

인류 사회는 많은 불합리를 생산하는 동시에 그 해결을 우리에게 요구하여 마지않는다. 여성 문제는 그 중의 하나이다. 세계는 이 요구에 응하여 분연히 활동하고 있다. 세계 자매는 수 천년래의 악몽으로부터 깨어서 우리의 생활 도정에 횡재하고 있는 모든 질곡을 분쇄하기 위하여 싸워온 지 오래이다.

이 역사적ㆍ세계적 혁명에서 낙오할 수 있으랴.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 운동이 개시된 것은 또한 오래이다. 그러나 회고하여보면 조선운동은 거의 분산되어 있었다. 그것에는 통일된 조직이 없었고 통일된 목표와 지도 정신이 없었다. 고로 그 운동은 효과를 충분히 내지 못하였다.


우리는 운동상 실천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으니 우리가 실제로 우리 자체를 위하여 우리 사회를 위하여 분투하려면 우선 조선 자매의 역량을 공고히 단결하여 운동을 전반적으로 전개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일어나라! 오너라! 단결하자! 분투하자! 
조선의 자매들아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발기인 대회를 마친 근우회는 더욱 회원을 확충하여 6월 17일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출범하였다. 창립총회는 〈1.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기함〉, 〈2.조선 여자의 지위향상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채택하고 지도부를 선출했다.  

회장 : 김활란
부회장 : 유각경 
서기 : 유영준ㆍ최은희ㆍ차사백
사찰 : 이덕요ㆍ주세죽ㆍ현덕신ㆍ강정희ㆍ임순분


창립총회는 다음과 같은 근우회 〈강령〉과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근우회 강령

1) 여성에 대한 사회적ㆍ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2)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3) 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4) 인신 매매, 공창 폐지.
5) 농촌 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6) 부인 노동의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ㆍ산후 임금 지불.
7) 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 노동과 야업 철폐. 


근우회 선언문

우리 조선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조선 여성의 모든 특수성을 고려하여 여성 따로의 전체적 기관을 가지게 되었나니(……) 조선 여성의 성숙 정도에 의하여 바야흐로 중대한 계단으로 진전하였다.  

부분적으로 분류되어 있던 운동이 전선적 협동 전선으로 조작된다. 여성의 각층에 공동되는 당면의 운동 목표가 발견되고, 운동 방침이 결정된다. 그리하여 운동은 비로소 광범하게 또 유력하게 진전될 수 있게 되었다. 이 단계에 있어서 모든 분열 정신을 극복하고 우리의 협동 정신으로 하여금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이 조선 여성의 의무이다.(…)

근우회는 이러한 견지에서 사업을 전개하려는 것을 선언하나니.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여자는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자.

 
여성 독립 운동 알리는 플래시몹 배재고, 배화여고, 정신여고 학생들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시몹을 펼치고 있다. 이날 플래시몹을 기획한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전 민주당 의원)은 "요즘 학생들이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 말고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역사가 왜곡된 것이나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다"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 말씀처럼 올바른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대중화시키기 위해 플래시몹을 준비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여성 독립 운동 알리는 플래시몹배재고, 배화여고, 정신여고 학생들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시몹을 펼치고 있다. 이날 플래시몹을 기획한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전 민주당 의원)은 "요즘 학생들이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 말고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역사가 왜곡된 것이나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다"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 말씀처럼 올바른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대중화시키기 위해 플래시몹을 준비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유성호
애국부인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여성운동 단체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근우회는 창립을 선언하면서 운동 목표로 1)선전ㆍ조직, 2)기관지 발행, 3)'여자의 날' 제정, 4)무산 여성의 직업활동 추진, 5)교양 사업, 6)여자의 생활태도, 7)인신매매 폐지 등을 제시했다.

근우회는 사업추진을 위해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으로 김활란ㆍ유명순ㆍ차사백ㆍ이현경ㆍ이덕요ㆍ황신덕ㆍ김선ㆍ유각경ㆍ박신우ㆍ정칠성ㆍ조원숙ㆍ현덕신ㆍ박원희ㆍ최은희ㆍ방신영ㆍ홍애시덕을 선출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여성활동가들이다. 

근우회는 창립대회를 마치고 시위행진을 시도했으나 일제경찰의 제지로 실행하지는 못하고 실내에서 농성을 벌였다.

근우회는 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지와 만주ㆍ일본에는 별도의 지부를 설치했다. 회원은 만 18세 이상의 여성으로 근우회의 강령과 규약에 찬동하며, 회원 2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 입회할 수 있도록 하고, 회원은 입회금 1원과 매월 20전 이상의 회비를 내도록 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근우회는 크게 확장되어 1929년 5월 현재 총 40여 개 지회가 결성되고, 회원은 2,971명, 직업별 구성을 보낸 가정부인 1,256명, 직업여성 339명, 학생 194명, 미혼여성 181명, 노동여성 131명, 농촌여성 34명이었다. 

근우회는 지회가 늘어나고 조직이 확대되면서 사회활동을 강화하였다. 서울지회가 채택할 9개조의 행동강령에서 활동의 윤곽을 살필 수 있다.

 1) 남녀의 정치적ㆍ사회적 절대 평등.
 2) 결혼의 자유, 직업의 자유.
 3) 인신매매의 철폐.
 4) 여자 교육의 확장, 현 교육 제도의 개선, 문맹 퇴치.
 5) 모성 보호.
 6) 무료 탁아소 및 육아소 설치.
 7) 여공의 보호, 노동 조건 및 공장 시설의 개선.
 8) 농촌 부인을 보호하는 제종 시설(諸種施設).
 9) 집회ㆍ결사ㆍ언론ㆍ출판의 자유.


근우회는 한때 사회주의계열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고, 1920년대 독립운동의 침체기에 더욱이 여성차별의 봉건적 유제가 여전한 시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운동이었지만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 여성계몽운동, 여성차별철폐 운동, 독립사상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독서회ㆍ토론회ㆍ강연회 등을 자주 열었다. 

근우회는 이런 활동을 전개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특히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여자청년회와 함께 1930년 1월 15일 서울 시내 10여 개 여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도록 그 계획과 실행을 지도하였다. 

근우회는 동반 단체인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1931년 5월 15일 내부의 해소론자들에 의해  해소론이 제기되고 이 해 말 본부와 지회가 모두 해체되었다. 신간회의 해소 배경과 유사한 과정이었다. 
 
#근우회 #3.1혁명 #김활란 #여성독립운동 #신간회_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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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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