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립 운동 알리는 플래시몹배재고, 배화여고, 정신여고 학생들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시몹을 펼치고 있다. 이날 플래시몹을 기획한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전 민주당 의원)은 "요즘 학생들이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 말고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역사가 왜곡된 것이나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다"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 말씀처럼 올바른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대중화시키기 위해 플래시몹을 준비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유성호
애국부인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여성운동 단체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근우회는 창립을 선언하면서 운동 목표로 1)선전ㆍ조직, 2)기관지 발행, 3)'여자의 날' 제정, 4)무산 여성의 직업활동 추진, 5)교양 사업, 6)여자의 생활태도, 7)인신매매 폐지 등을 제시했다.
근우회는 사업추진을 위해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으로 김활란ㆍ유명순ㆍ차사백ㆍ이현경ㆍ이덕요ㆍ황신덕ㆍ김선ㆍ유각경ㆍ박신우ㆍ정칠성ㆍ조원숙ㆍ현덕신ㆍ박원희ㆍ최은희ㆍ방신영ㆍ홍애시덕을 선출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여성활동가들이다.
근우회는 창립대회를 마치고 시위행진을 시도했으나 일제경찰의 제지로 실행하지는 못하고 실내에서 농성을 벌였다.
근우회는 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지와 만주ㆍ일본에는 별도의 지부를 설치했다. 회원은 만 18세 이상의 여성으로 근우회의 강령과 규약에 찬동하며, 회원 2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 입회할 수 있도록 하고, 회원은 입회금 1원과 매월 20전 이상의 회비를 내도록 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근우회는 크게 확장되어 1929년 5월 현재 총 40여 개 지회가 결성되고, 회원은 2,971명, 직업별 구성을 보낸 가정부인 1,256명, 직업여성 339명, 학생 194명, 미혼여성 181명, 노동여성 131명, 농촌여성 34명이었다.
근우회는 지회가 늘어나고 조직이 확대되면서 사회활동을 강화하였다. 서울지회가 채택할 9개조의 행동강령에서 활동의 윤곽을 살필 수 있다.
1) 남녀의 정치적ㆍ사회적 절대 평등.
2) 결혼의 자유, 직업의 자유.
3) 인신매매의 철폐.
4) 여자 교육의 확장, 현 교육 제도의 개선, 문맹 퇴치.
5) 모성 보호.
6) 무료 탁아소 및 육아소 설치.
7) 여공의 보호, 노동 조건 및 공장 시설의 개선.
8) 농촌 부인을 보호하는 제종 시설(諸種施設).
9) 집회ㆍ결사ㆍ언론ㆍ출판의 자유.
근우회는 한때 사회주의계열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고, 1920년대 독립운동의 침체기에 더욱이 여성차별의 봉건적 유제가 여전한 시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운동이었지만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 여성계몽운동, 여성차별철폐 운동, 독립사상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독서회ㆍ토론회ㆍ강연회 등을 자주 열었다.
근우회는 이런 활동을 전개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특히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여자청년회와 함께 1930년 1월 15일 서울 시내 10여 개 여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도록 그 계획과 실행을 지도하였다.
근우회는 동반 단체인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1931년 5월 15일 내부의 해소론자들에 의해 해소론이 제기되고 이 해 말 본부와 지회가 모두 해체되었다. 신간회의 해소 배경과 유사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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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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