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혁명에 참여한 어린 소년을 붙잡는 일본 헌병경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895년 남원군 주생면에서 출생했다고 하니, 당시 나이 스물 넷. "평소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강했던" 청년이라고 했다. 장날을 맞아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진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움직였다. "가까이 지내던 이웃들에게"는 참여를 권했고, "독립만세운동 지도자 몇 몇 인사들과는" 의논했다고 한다.
4월 4일 오후 2시, 그는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일제의 총탄이 관통했다. 남원 3.1 투쟁에서 첫 번째 희생자라고 한다. 이어 방명숙, 방양규, 방제환, 방진형 등도 사망했다. 같은 날 집안 사람 다섯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들과 함께 숨을 거둔 가족은 또 있었다. <남원 항일운동사>는 이렇게 전한다.
"남편의 죽음을 들은 그의 아내가 냇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빨래 방망이를 들고 쫓아와 일제 헌병과 대적하다가 역시 총에 맞아 죽었는데, 아들과 며느리의 죽음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쫓아와 '왜 내 아들과 며느리를 죽였느냐? 내 아들과 며느리를 살려내라'고 헌병들에게 대들다가 역시 총에 맞아 죽으니, 훗날 사람들은 그들 셋을 가리켜 '남원의 삼순절'이라고 불렀다."
서울 탑골공원 만세운동 조형물에도 남아 있다는 그 처참한 '광경'에 안타까움을 더 하는 지점이 있다. 이 여성들의 이름을 후손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여성의 이름을 족보에서 발견하기 어려웠던 시대, 일가가 한꺼번에 끔찍하게 목숨을 잃은 상황이 남긴 후유증임에 분명하다.
3.1 운동인가, 3.1 혁명인가
2019년 3월 1일,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렸던 그 곳, 남원 광한루원에서 '3.1절 만인만북 문화제'라는 행사가 열린다. 시민들이 모여 100주년을 맞아 자발적으로 준비한 문화제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졌던 그 길을 따라 행진도 한다고 한다. 행사 소개에서 이 문장이 특히 눈에 띄었다.
"3.1 만세 운동은 남원 민중들의 자발적인 봉기였고, 우리 민족 최초의 민주 정부인 상해 임시 정부를 세운 위대한 혁명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혁명의 대열에 여성들 또한 분명 있었다. 아들의 죽음에, 남편의 죽음에,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한 여성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자신의 이름도 남기지 못한 이들의 죽음이 또 얼마나 많았을까. 이와 같은 죽음들을 담기에 '7509'은 턱없이 작은 숫자임에 분명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사실을 후손들이 기억하기에 그 명칭 또한 모자람이 분명 많다.
3.1 운동인가, 3.1 혁명인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