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
권기봉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이와 같은 임시정부의 처사를 군정에 대한 쿠데타라고 비판하면서 김구를 구속하여 인천감옥에 수감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한국 민중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올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시정부(김구)와 미군정은 돌이키기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
해방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ㆍ우세력의 찬반투쟁으로 갈리고 통일정부 수립과 친일파 청산 등 민족적인 과제는 실종되었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비록 실체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정치적으로는 가장 활발하게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세대에 걸쳐 피어린 항일투쟁으로 독립된 나라가 또 다시 외국의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임시정부 측의 소신이었다.
김구는 미군정뿐 아니라 소련측으로부터도 배척되었다. 1946년 3월 20일 미ㆍ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소련 대표 스티코프가 김구를 '반동적ㆍ반민주주의적' 이라 비난하면서 "앞으로 수립된 민주주의임시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는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한 대동단결의 토대 위에서 창설되어야 한다"고 하여 사실상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을 배제하는 발언을 하였다. 김구는 격노하여 하지와 만난 자리에서 이를 따졌다.
김구 : 장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는데 당신들은 나라를 전략적으로 점령한데 불과하오. 자주독립 정부를 세워야 할 것이 절실한 당면 과제인데 미ㆍ소 양국이 한국에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소.
하지 : 김구 선생, 신탁통치안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조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 역시 한국의 자주정부수립을 희망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김구 : 아니 잠정적인 조치일 뿐이라니, 물론 장군도 소련 스티코프란 자의 개회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이번에 열리는 미ㆍ소공위는 한민족 전체의 염원을 짓밟는 강대국의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소. 따라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당연하고도 엄숙한 의사표시인 것이오.(<백범김구전집>, 제5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면서 좌우합작을 이루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본토진격 등을 준비하였다. 1919년 3ㆍ1혁명을 계기로 4월 11일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중국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일제와 싸운 한민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28일 건국강령을 제정하여 해방 후 건설할 민족 국가의 성격과 강령을 마련하고, 12월 10일에는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는 한편 1944년 4월 약헌(헌법)을 개정하여 부주석제를 신설,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영입하고 민족혁명당 등과 통합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출범시켰다.
임시정부는 또 국무위원 장건상을 옌안에 특사로 파견하여 김두봉을 비롯한 독립동맹 간부들을 만나, 충칭에 모여 통합문제를 협의키로 하였다. 그러나 시국이 급진전하면서 김두봉의 충칭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것이 성사되었으면 해방 후 통일 과업을 논의하는 데도 큰 기여가 될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임시정부의 당면 정책〉14가지를 제시했다.
1. 임시정부는 최속기간 내에 입국할 것. 2, 미ㆍ소ㆍ영 등 우방과 제휴하고 연합국 헌장의 준수, 3, 국내에 건립될 정식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ㆍ민주정부ㆍ균등사회를 원칙으로, 4,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 처단 등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