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일상화된 한국 사회 두렵다"3월 14일, 박혜정 씨가 대학 강의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박 씨는 "성범죄가 일상처럼 일어나는 한국 사회가 두렵다"면서 이제라도 반복적인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진짜 문제를 꼬집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종헌
96년생 박혜정씨는 열세 살이던 2008년부터 지금까지 10여 년간 빅뱅 팬으로 활동했다. 중학교 1학년이던 2008년부터 이른바 '공방(공개방송)'을 뛰었다. 회원 수 500여 명 규모의 팬카페도 운영했다. 학창 시절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 빅뱅 앨범을 사고, 팬메이드 스티커를 만들기 위해 포토샵을 배웠다. 동방신기를 좋아하던 같은 반 친구들과는 아무리 노력해도 친해지지 못했다며 웃었다.
94년생 조수지(가명)씨 역시 2008년부터 공식 팬클럽 'VIP'의 회원이었다. 고등학교 때 팬클럽 활동은 그만뒀지만, 대학에 와서도 계속 빅뱅을 응원했다. 암스테르담으로 교환학생을 가 있던 당시 관람한 지드래곤의 콘서트는 아직도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조씨는 탑이 훈련소에 있을 때 위문편지도 썼다고 털어놨다.
"요즘 방탄소년단이 인기지만, 빅뱅은 다른 의미에서 '국민 아이돌'이었잖아요. 빅뱅을 좋아하지 않는 또래들도 누구나 빅뱅 노래는 즐겨 들었으니까요."
96년생 김윤희씨는 빅뱅 데뷔 직후 팬이 돼 12년째 활동 중이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학창시절 내내 빅뱅 콘서트를 가보는 게 꿈이었다. 중학교 때 성적이 큰 폭으로 오르자 부모님이 콘서트 티켓을 끊어주었다. 비행기를 타고 처음 간 콘서트장에서 김씨는 펑펑 울었다. 그는 지금까지 출시된 모든 굿즈(기념품)와 앨범을 갖고 있다. 김씨는 빅뱅을 '10대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절반 동안 제 삶의 모든 것은 빅뱅에 맞춰져 있었어요. 서울 소재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도 서울에서 살면 빅뱅 콘서트에 자주 갈 수 있으니까. 빅뱅은 단순한 아이돌을 넘어서 제 인생의 가장 천진했던 시기를 함께한 '문화'였어요."
그런데 큰 사건이 터졌다. 한때 응원하던 스타가 연루됐는데, 흔한 경범죄가 아니었다. 그들은 큰 건수의 계약을 물어올 때엔 '잘 주는 애'를 찾았고, 상대방 동의 없이 촬영한 성관계 동영상을 돌려보며 낄낄댔다. 제보자 방정현 변호사에 따르면 이들의 단체채팅방에는 어떤 여성들에게 마약을 먹인 뒤 그들을 강간한 정황도 있단다.
의혹은 터지고 또 터지는 중이다. 게다가 피해자 대부분은 이들의 또래다. 김윤희씨는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때의 충격을 천천히 되짚었다.
"처음 승리 이름이 거론될 때만 해도 그냥 넘겼죠. 빅뱅 멤버들이 워낙 논란의 중심에 선 적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성 접대, 마약 같은 얘기가 나오게 되면서… 이런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지금도 너무 혼란스러운 상태예요."
'버닝썬 게이트'는 힘 있는 자들만의 '일탈' 아니다
연예계 전반은 물론, 경찰 고위층으로까지 뻗어나가는 '버닝썬 게이트'는 어떻게 현실이 됐을까. 가해자들의 재력, 방송계에서의 영향력, 인기 덕분 아니었을까. 하지만 '빅뱅세대' 세 사람의 대답은 의외였다.
"물론 이렇게 대담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오랜 기간 숨겨 왔던 것은 연예인들과 부호들, 그리고 공권력 사이를 잇는 권력 카르텔 덕분일 수 있겠죠. 그러나 제 생각에 그들이 단지 돈이 많아서, 인기가 좋아서 이런 범죄를 저지른 것 같진 않아요."
"권력을 얻었다고 그릇된 가치관이 저절로 생겨나나요? 전 아니라 생각하거든요."
그들은 이번 사태의 근원을 '남성들의 문화'로 지적했다.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남성인 기자와 여성인 인터뷰이 사이에 어떤 거대한 장벽이 세워져 있는 것일까.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이들은 대표 사례로 '대학가 단톡방 사건'을 꼽았다. 얼마 전 다수의 대학에서 남학생들이 단체 카톡방을 만든 뒤 여학생들의 신체를 몰래 촬영해 이를 평가하거나, 특정 여학생과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처럼 떠벌리는 등의 대화를 나눈 사실이 밝혀져 큰 물의를 빚었다. 당시 남학생들의 대화는 상당수의 남성들이 일상 속에서 여성을 자연스레 대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박혜정씨는 "카톡방처럼 수평적으로 보이는 공간에서도 여성을 전리품 취급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위계권력만이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물론 이번 '버닝썬' 사건과 대학가 카톡방 논란을 동일 선상에 놓고 보기엔 규모나 수위 면에서 큰 차이가 있어요. 하지만 두 사건이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원인을 공유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는 거죠."
문득 잊고 지내던 일이 생각났다. 군 복무 시절, 기자의 선임 한 명은 음악방송에 여자 아이돌이 나오면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며 "강간하고 싶다"는 말을 던졌다. 그 말에 불편함을 느낀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끝내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선임의 전역 후에도 그의 재밌는 행동과 함께 '옛 이야기'로 종종 회자됐다. 기자 역시 그런 말을 문제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웃어 넘겼다. 하지만 여성들은 우리가 그렇게 스쳐지나간 폭력의 순간들을 꼬집고 있었다.
여전히, 달라도 너무 다른 세상을 사는 남과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