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일찌기 없던 공포분위기'와 '3인조 공개투표 감행?', '사복경찰이 공개투표지휘'하는 기사제목이 선명하다. 동아일보는 3.15선거를 부정선거로 정의한 것이다.
동아일보
이런 자유당의 부정선거 계획이 말단 경찰관에 의해 언론에 폭로되었다. 자유당의 부정선거 폭로내용은 4할 사전투표와 3인조ㆍ5인조의 공개투표 외에 ∆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야당 성향 유권자의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 투표함 바꿔치기 ∆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 득표수 조작발표 등이 포함되었다. 이렇게 부정선거의 음모가 사전에 폭로되었는데도, 자유당의 관권ㆍ부정선거는 멈추기는커녕 더욱 거침없이 공개리에 자행되었다.
자유당은 이같은 관권부정 외에도 엄청난 선거자금을 조달하여 유권자를 매수하거나 동원비에 썼다. 이기붕ㆍ한희석ㆍ박용익ㆍ송인상 등이 협의하여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을 통해 거액의 은행자금을 기업에 융자해주고 그 융자금을 선거자금으로 염출했으며, 기업인들로부터는 별도로 선거자금을 끌어모았다. 이렇게 모은 부정선거 자금이 천문학적 수준이었다.
선거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전남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괴한에게 구타ㆍ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전국 도처에서 폭력이 난무했다. 민주당은 자유당의 부정선거 계획과 내무부의 부정투표지령을 폭로하면서 부정 살인선거의 중단을 촉구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자유당 정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3월 15일 실시된 선거는 자유당의 사전계획대로 전면적인 부정선거로 이루어졌으며 야당 참관인들이 거의 퇴장한 가운데 부정투개표가 진행되었다. 민주당 중앙당은 이날 전국의 모든 선거참관을 포기하는 한편 선거의 불법무효를 선언했다.
어용기관이 된 중앙선관위는 선거결과를 발표, 전국의 유권자 1,119만 6,498명 중 1,050만 9,482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963만 3,376표로 이승만이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통령에는 833만 7,059표를 얻은 이기붕이 당선되었다고 공고했다. 장면은 184만 4,257표, 김준연은 23만 5,526표, 임영신은 9만 9,090표를 얻었다. 이승만은 전체 유권자의 92%, 이기붕은 78%를 득표했다는 발표였다.
개표가 진행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수가 총유권자수를 초과하기도 하여 자유당측은 내무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이승만은 80% 정도로, 이기붕은 70~75% 정도로 하향조정하도록 지시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선거가 아니라 선거라는 이름의 정치곡예였다.
3ㆍ15선거가 부정과 폭력과 난장판으로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많은 국민이 분노에 떨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용기 있게 떨치고 일어선 것은 마산의 시민ㆍ학생과 야당 당원들이었다. 야당 당원들을 더욱 분개시킨 것은 자유당으로 변신한 이 지역 출신 허윤수 의원 때문이었다.
마산시민ㆍ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이를 강제해산시키려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ㆍ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내게 되자 격분하여 남성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자유당으로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 이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는 등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은 시위 주모자로 구속한 26명을 공산당으로 몰아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정부는 마산의거를 공산당의 조종으로 몰아붙여서 더욱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