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남 전 의원.
구영식
발칸반도의 비극은 어디에서 왔냐 하면...
- 발칸반도는 민족과 종교, 이념 등의 갈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다. 오죽했으면 "유럽의 화약고"라는 별명이 붙었겠나? 소설의 주요 소재인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은 어디에서 왔다고 보는가?
"우선 유고슬라비아가 비극적이고 좀 뒤떨어진다는 선입관부터 바꾸고 싶다. 그렇지 않다. 서유럽이 무지몽매한 나라였을 때 이미 거기는 찬란한 동쪽으로부터의 문화를 꽃피웠다. 동로마문명을 꽃피웠던 세계 최고의 지역이었다. 동로마가 망한 게 1453년이다. 그러니까 서유럽의 르네상스시대까지 있었다. 터키 등 동방의 문화가 얼마나 찬란했나? 이슬람 문명이 대단한 문명이다.
그런데 서양은 그것을 자꾸만 평가절하했다. 대단치 않는 문명인 것처럼 말이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거다. 문명으로 보면 발칸반도가 서유럽보다 훨씬 선진국이었고, 대단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중간에 전쟁이 많았다. 14세기, 15세기 이후에 일어난 전쟁 때문에 다사다난했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가는 통로에 있어서 마주쳤다. 우선 종교가 마주쳤다. 이슬람과 크리스찬교가 마주쳤다. 크리스찬교도 개신교와 기독교, 동방정교(동로마)가 있는데 완전히 다르다. 얼마나 서로를 적대하고 싸웠는지 모른다. 같은 크리스찬교가 아니다. 거기가 세 종교의 접합점이다.
그리고 민족도 마주쳤다. 민족이 동쪽에서도 오고, 북쪽에서도 내려왔다. 동쪽에서는 이슬람족이 왔고, 북쪽에서는 슬라브족이 내려왔다. 서쪽에는 라틴족이 있었고. 거기가 그러한 민족들의 접점이었다.
종교적, 문화적, 민족적 접점이 15세기, 16세기 이후에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여러 민족이 중간지역에 모이게 됐다. 그러다 보니 더 복잡해지고 전쟁도 많아졌다. 그 다음부터는 '화약고' 비슷하게 돼 갔다. 내 책에도 많이 나오지만 발칸에 사는 크리스찬들은 자기들이 이슬람교를 막아낸 방파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세르비아 사람들이 그렇다. 세르비아가 이슬람세력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서구가 다 이슬람화됐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슬라브족이 북쪽에서 내려옴에 따라 민족적인 갈등이 일어났다. 민족이라는 게 항상 문제다. 내가 책에서도 민족주의를 굉장히 많이 비판했다. 민족이라는 집단이 형성되면 이기적이고, 투쟁적이게 된다. 민족주의 시대가 17~18세기에 왔다. 동쪽에서는 이슬람족이, 북쪽에서는 슬라브족이 내려왔고, 서쪽에는 원래 라틴족이 있었다. 이게 합쳐져서 민족주의가 형성돼 서로 싸웠다. 대개 종교는 공통되지만 그로 인해 어려워졌다.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게 있다. 강대국들이 발칸반도에 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게르만족이 강대국이 됐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가 굉장히 강성했다. 또 북쪽에서 내려온 러시아 슬라브족이 강대국이 됐다. 오스트리아가 원래도 강대국이었는데 19세기 이후에는 독일이 붙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합쳐진 게르만족은 더 강해졌다. 바다 건너서는 라틴족이 강했다. 이들이 발칸반도로 쳐들어오니 동쪽의 오스만 터키가 가만 있나? 서방으로 진출하려고 하고, 과거에 점령했던 지역을 지키려고 했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거기에 있던 조그만한 민족들이 지배를 당하면서 고통을 받았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터키 양쪽으로부터 공격받았다. 서방에 있는 나라들은 16~17세기를 지나면서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거대한 제국을 이뤘다. 그 나라들은 커졌지만 발칸반도에 있는 조그만 민족들은 커지지 않았다. 여기 저기서 얻어터지고, 게르만족과 이슬람족, 이태리 등의 식민지 생활을 오래 했다. 18~19세기에 외세에 의해 전쟁을 많이 치렀다.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이슬람족이 자기 식민지로 만들려고 발칸반도에서 영토쟁탈전을 벌였다. 발칸반도에서 전쟁을 한 거는 대부분이 발칸 민족 자신이 아니라 강대국들이 와서 쟁탈전을 벌인 게 많다. 슬라브족, 게르만족, 이슬람족 3대세력이 서로 판도를 확정하기 위해 발칸에서 싸운 거다. 그래서 발칸 사람은 이리저리 자기 이익도 아닌데 전쟁을 많이 겪게 됐다. 이렇게 종교, 민족의 접합점이 발칸이고, 거기다 강대국들이 영토확장정책을 펴서 강대국들끼리 만난 게 발칸이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이 만나는 접점이 발칸이다 보니 화약고가 안 될 수가 없다.
국경선이 들락날락 하니까 많은 민족이 섞이게 됐다. 세르비아 안에 알바니아인들이 살고, 크로아티아 안에 세르비아인들이 살고. 이렇게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에 여러 민족이 살게 된 거다. 그러니 한 나라 내부에서도 싸웠다. 보스니아 같은 곳은 완전히 민족이 짬뽕이다. 보스니아 안에는 보스니아 사람들뿐 아니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사람들도 많이 살고, 무슬림도 많이 살고 있다. 그래서 크로아티아도 보스니아 내 자기 민족을 보호하려고, 세르비아도 보스니아 내 자기 민족을 지원하려고, 터키나 알바니아 등 이슬람국가들도 무슬림을 보호하려고 하다 보니 내란이 벌어진 거다.
2차 세계대전 후에 그것을 통합국가로 만든 사람이 티토다. '민족, 종교 가지고 싸우지 말고 우리끼리 뭉쳐서 살자'는 거다. 티토가 워낙 영웅적인 사람이어서 그거를 할 수 있었다. 1945년부터 1980년까지 35년간 철권 정치를 하면서 동시에 6개 나라를 강제로 묶어서 살게 했다. 그때가 평온했다면 평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티토가 죽으니 이걸 유지할 영웅이 없었다. 그동안 막혀 있던 민족자립이 또 터지기 시작했다. 그런 움직임이 1990년대에 나왔고, 서로 싸우게 됐다."
카라지치·믈라디치·갈리치 대 프랄랴크
- 소설 속 여주인공은 그 원인을 "강대국들의 간섭"과 "민족이나 종교, 이념을 내세우는 가짜 지도자의 선동"이라고 진단했는데.
"거기에다 지리적 위치가 추가돼야 한다. 특히 내가 책에서 '가짜 지도자' 얘기를 했다. 민족, 종교끼리 화합하게 만들어서 전쟁을 피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는 게 정치가의 사명이다. 그런데 정치가의 야심은 끝이 없다. 이것은 정치가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국내에서 권력을 잡으면 민족이나 종교를 이용한다. 특히 민족감정을 엄청나게 자극하면서 상대 민족에 대한 적대심을 부추긴다. '우리가 나서야 한다', '우리것을 지키고 확장해야 한다'고 하면 대중들은 그것을 따라가게 돼 있다. 민중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포퓰리즘이다.
민족주의의 대표 히틀러도 그랬다. 문명국이라던 독일도 그랬는데 하물며 이쪽이야 더 하다. 히틀러도,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종교 지도자들도 '가짜 지도자'다. 그래서 '평화의 지도자'가 나와야 하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참극을 겪고 반성해야 나오는 것 같다. 독일도 20세기 중반까지 그랬다가 이제야 깨달은 거다. 요즘 독일은 나치스를 찬양하면 처벌한다고 그러던데 과거에서 교훈을 얻은 거다.
선동적인 포퓰리즘으로 군중을 선동하는 가짜지도자들이 유고슬로비아 내전을 일으킨 책임이 크다. 거기에다 서방국들이 각자 자기 이익을 위해 투쟁을 조장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민족을 지원했다. 뒤에서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서방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지원하고, 이슬람족은 보스니아 내 무슬림들을 지원하고.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닌 진정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민족주의를 가지고 되겠나? 민족을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지만 화합적, 평화적인 민족주의, 더 나아가 시민주의로 가야 한다. 민족끼리 적대적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세계사의 교훈이다. 민족, 종교끼리 서로 교류하고 돕고 평화를 유지하는 시민주의로 가야 한다. 이제 민족주의 시대는 지나가야 한다. 파괴적, 분쟁적 민족주의로 가서는 안 되고 (최소한) 개방적 민족주의로 가야 한다. 정치가들이 포퓰리즘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편협한 민족주의를 강조해서는 안 된다."
- 소설 속에 나오는 발칸반도의 지도자들 가운데 카라지치·믈라디치·갈리치 대 슬로보단 프랄랴크는 극적으로 대비되는 인물들이다. 전자는 도망다니다가 도피했고, 전범 재판에서도 사실을 부정하거나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한 반면, 후자는 오히려 스스로 재판소에 출두했고,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에서 일부 일탈행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만 프랄랴크는 '크로아티아계와 이슬람계라는 두 민족간에 벌어진 필연적인 전쟁이었고, 자신은 크로아티아 민족을 지키기 위한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라며 자신이 전범이라는 것을 강하게 부정했다. 소설 속 남자주인공은 전자와 후자 가운데 후자에 더 공감하는 편인 것 같던데 어떤가?
"그렇게 나온다. 나 스스로도 그렇다. 프랄랴크도 잘못한 건 사실이고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프랄랴크의 잘못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고, 인간적으로 이해할 측면이 있다. 그래서 프랄랴크를 주인공으로 한 거다. 내가 카라지치(세르비아계 스릅스카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보스니아 무슬림을 학살한 죄로 징역 40년을 선고받음)나 믈라디치(스릅스카공화국의 참모총장으로 사라예보 포격, 스레브레니카 학살 등을 주도해 '발칸의 도살자'로 불림)를 주인공으로 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고 반성하는 기미도 없었다. 카라지치는 10년 동안 도망 다녔다.
프랄랴크는 우선 문화인이고 영화감독이다. 원래 자기가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추대돼서 한 거다. 다만 지휘자 책임, 지도자 책임이 인정됐다. 밑에 있는 사람이 했다고 해서 '나는 몰라라' 하는 게 허용이 안 됐다. 국제유고전범재판의 특징 중 하나가 '지휘자 책임론'이 주장된 거다. 세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다. 이것은 위대한 법률적 발전이라고 본다. 앞으로 전쟁 중에 잔악행위를 할 때 부하가 했다고 해서 '나는 모른다', 설사 모른다고 해도 용서가 안 된다는 하나의 판례가 나온 거다. 이것은 획기적인 판례다.
그래도 프랄랴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20년으로 비교적 약했다. 프랄랴크는 10여년간 재판을 해서 석방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독배를 들이켰다. 인간적으로 보면 프랄랴크가 동정적인 면이 많다. 프랄랴크는 크로아티아에서 영웅이다. 전범재판소로부터 호출을 당했을 때 스스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다른 사람 같으면 안 갔다.
보스니아 사람이지만 크로아티아에 피신해 있었고 크로아티아에서 보호해주고 있었다. 카라지치나 믈라디치는 세르비아 정부가 보호하지 않았다. 숨어 있던 카라지치와 믈라디치를 적발한 것은 세르비아 신정부였다. 밀로세비치가 무너지고 정권이 바뀌면서 신정부가 반성한 거다. 유럽연합에서도 'EU에 가입하려면 카라지치와 믈라디치를 잡아내라'고 했다. 그래서 세르비아 신정부가 잡아낸 거다.
하지만 프랄랴크는 크로아티아 정부가 두둔했다. 프랄랴크는 자진해서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같이 갔다. 자그레브 공항에 크로아티아 군중이 나와서 용감하다고 환호했다. 프랄랴크는 '나는 저들이 쳐들어와서 우리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이건 전쟁이다'고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포격 등 잔혹행위가 벌어졌기 때문에 지휘자 책임을 져야 했다.
프랄랴크는 재판소에 가서도 '나는 모른다'고 회피하지는 않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도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십 몇 년간 재판하면서 재판장과 논쟁했다. 그렇게 논쟁하니까 크로아티아에서는 영웅이었다. 자존심도 있었겠지만 영웅심리 때문에 독배를 마시는 것까지 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곧 석방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비장한 결단을 내려서 크로아티아에서는 지금도 영웅이다.
그러니 카라지치나 믈라디치와는 굉장히 다르다. 나도 동정이 가더라. 그렇다고 내가 국제유고전범재판소에서 지휘자 책임론을 인정해 그에게 20년 선고한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서 피치못하게 해야 할 일이었다. 다만 다른 전범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서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거다."
프랄랴크 20년 선고 "역사적 책임의 총량이 다르다"
- 다른 배석 판사들은 징역 40년을 주장했지만 재판장이었던 남자주인공은 최종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이러한 양형의 이유로 "역사적 책임의 총량이 다르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해명이 합당하다고 보나?
"그건 내 창작이다. 권오곤이 한 게 아니다. 프랄랴크는 권오곤이 재판한 게 아니다. 나도 가만히 생각해봤다. 왜 프랄랴크가 카라지치나 믈라디치에 비해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까? 물론 나쁜 짓을 덜 했기도 하지만 동정적인 여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배석 판사가 40년을 주장했다는 것도 내 창작이다. 남자주인공이 프랄랴크에 경도하는 기색이 있다. 나도 프랄랴크를 동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에는 자유심증주의라는 게 나온다. 그게 판사들의 고민이다. 차별없이 재판하고 선고해야 하는데 그게 판사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자기가 봐서 덜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면 형량을 줄여주는 거다. 프랄랴크는 어느 날 재판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쓴 논문을 읽다가 재판을 끝낸 날도 있었다. 재판장과 그렇게 논쟁하고, 크로아티아가 어떤 나라인지를 설명했다. 그런 것들을 듣다 보면 판사도 동정이 갈 수 있다."
- 소설에도 나오지만 프랄랴크가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직후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굉장히 유명한 사건이다. 당시 전 세계에 방영됐다. 지금도 유투브에 나온다. 전 세계에 쇼크였다. 역사적으로 그런 예가 없을 거다. 그래서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벌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 가능하냐?' 알아보니까 재판하러 들어오는데 쇠(금속) 검사만 했다. 약 먹는 환자들이 많으니까 약을 가져오는 것도 허용됐다. 금속이 아니면 세밀하게 검사를 안 한 거다. 그리고 독약을 가져올 거라 상상을 못했다.
그러면 그 청산가리를 어떻게 입수할 수 있었나? (감시가) 좀 느슨했던 것 같다. 재판받는 데가 어수선했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비공식으로 감옥에 (청산가리 등을) 들여올 수 있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헤이그에서는 굉장히 논란이 많았다. 독약이 반입된 거는 자기들 책임 아닌가? 헤이그 경찰이 난리났다.
프랄랴크는 크로아티아에서는 영웅이었다. 시민들이 촛불집회도 하고,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나와서 '우리 프랄랴크 장군 어쩌구' 하는 연설도 했다. 민족주의가 아직도 있는 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평화는 잠정적인 평화, 가식적인 평화일지도 모른다. 강대국들이 억지로 휴전시켜서 휴전된 거여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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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①] 소설가로 데뷔한 '천신정'의 '신' "발칸=비극' 선입관 깨고 싶었다"
[인터뷰 ③] 유고전범 재판의 판결은 합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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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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