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에 직접 참여한 앨범들.포트폴리오로 활용하여 취업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재표
그렇게 몇 주간 밤을 새워가며 입사 지원 신청서를 씨 뿌리듯 내버리고, 합격 연락을 기대하며 침대에 몸을 눕히는 것이 일상이었다. 여자친구와는 취업 이후를 상상하며 월급을 어떻게 계획적으로 쓰면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도 이력서를 열람한 회사들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내 기대는 사회의 '냉철한 기준' 앞에서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했다.
나 같은 실무 경험을 가진 사람을 뽑지 않으면 누구를 뽑는 것이냐고 생각해 애꿎은 회사를 무시해버리기 일쑤였고, 어느 날은 이러한 일들을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대학교에서 같이 음악을 했던 친구에게 만나자고 문자를 보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였기에, 추억의 향수에 젖어 함께 자주 갔던 대학로 막창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랜 친구와 오랜만에 맛보는 막창과 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학 생활 추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흘러 병이 서너병까지 늘어나자, '취업 전선'에서 있었던 일들을 술기운을 빌려 모두 말하게 되었다.
"거 취업하려면 앨범 잘 만들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데."
"요즘엔 스펙이라고 내세울 거 없으면 서류 전형에서 다 떨어진다."
일찍 취업한 친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른 회사는 어떤지 몰라도 우리 회산 뭐, 토익이나 자격증, 대외활동 내역 같은 거 하나라도 없으면 면접장 구경도 안 시켜준다, 아나?"
누군가가 뒤통수에 망치로 세게 내려친 것만 같았다. 이어서 귀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더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됐다, 내 막차 시간 됐으니까 일어나자."
몇 분의 정적이 흐른 후, 친구가 일어나며 말했다. 계산할 마음도 없으면서, 괜히 친구가 계산한다는 걸 막는 척 하다 가게를 나왔다. 취업하면 그때는 내가 사리라고 큰소리를 쳤다. 친구는 말없이 웃으며 손 인사로 답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소리 없이 울고 말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머릿속이 어지럽고 감정이 격해진 탓이었다. 그 친구를 욕하며 사회의 냉혹함을 원망했고, 이어 '나는 왜 이렇게 힘들어야만 하는가?' 하고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설레발로 포장된 과거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눈물이 더 쏟아져 나왔다. 버스가 끊겨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계속 훌쩍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사회의 냉기를 감당해낼 만큼 마음이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스펙 쌓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의 '스펙 쌓기'는 '스펙 모으기'에 가까웠는데, 정년을 앞둔 부모님은 내가 하루빨리 취업하기를 원했고, 그로 인해 다른 자격증을 따거나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리트 부서에서 일하는 줄 알았는데
매일 밤,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력서의 빈칸을 채워 넣기 시작했고, 어학성적이 없다는 사실을 내 전공에 전념했다는 증거로 포장했다. 봉사활동 내역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억나지 않았으나, 교양수업 과제로 요양병원에서 공연 봉사활동을 했던 기록을 '1365 자원봉사포털'에서 찾아내었다. 정보화 시대에 태어났음에 처음으로 감사했던 순간이었다.
이 정도의 준비를 했으면 이제 취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사/기획 직무를 지망하였으나,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일반 사무직까지도 이력서를 써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몇 군데에서 면접을 보러오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설렘 반, 두려움 반 두근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이곳저곳으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