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
이상옥
나도 저토록 애달프게 울부짖던 시절이 있었네
콩밭 매러 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엄니 젖가슴이 그리워
- 고진하 디카시 <제비새끼들>
계간 <디카시> 2019년 봄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누군에게들 저런 시절이 없었겠는가마는 유년기에는 엄마만 있으면 세상이 다 있는 것 같았다. 반면 엄마만 없으면 세상이 텅 빈 듯했다. 제비새끼가 울부짖는 모습을 시인은 보고 "나도 저토록 애달프게 울부짖던 시절이 있었네"라고 생각한다. 곰곰이 더 생각해보니 그것은 엄니 젖가슴이 그리워서였다는 것.
이 디카시를 읽으며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고진하 시인은 목사이기도 하다. 아마, 고진하 목사도 제비새끼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떠올랐지 않았을까.
이 디카시도 디카시의 극순간성을 잘 드러낸다. 제비새끼들의 처절하게 보이는 울부짖음을 보는 순간 유년의 시인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것뿐이다.
원래 일반 시는 저렇게 단순해서는 시적 울림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문자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제비새끼들의 울부짖는 풍경이 더하니 사뭇 진지해진다. 엄니가 물고 오는 벌레 한 마리에 목숨을 건 듯이 온 몸으로 울부짖는 제비새끼들 영상의 함의는 문자와 함께 인간의 근원적 욕구 혹은 순수성을 생각하게 한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엄마 하나만으로도 만족했다. 지금 시인은 엄니 젖가슴을 그리워하지도 않을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저렇게 울부짖던 시절"은 아니니 마냥 행복하다는 말인가.
언뜻 표면적으로는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 애달프게 엄니를 기다리며 울부짖던 시절을 참 철없던 짓이었다 자책하는 듯하게도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그 시절을 사무치게 더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연화산 산행길 길동무
요즘 나는 우연히 집 마당으로 들어온 길강아지 복실이를 키우며 행복해 하고 있다. 복실이는 마치 고진하 시인이 본 제비새끼 같다. 복실이는 나를 엄마 정도로 아는지 늘 따라다닌다.
요즘 내가 복실이에게는 세계의 전부일 것이다. 종종 고향집 인근 연화산 산행길에도 길동무가 되고 있다. 제비든 개든 사람이든 세월의 무게가 쌓이면 성숙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면 더 큰 걸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