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성고문사건부천 성고문사건 피해자 권인숙양과 담당변호사 조영래 변호사
연합뉴스
포악한 독재체제에서는 관리들도 포악해진다.
히틀러나 스탈린, 일제와 유신체제하의 수사관들의 행태를 보면 잘 알게 된다. 전두환 체제에서 일부 검ㆍ경ㆍ정보요원 등의 행위는 야만, 그것이었다. 악독한 자들이 출세하는 변칙상태여서 악행이 계속되고, 견제 기능이 차단되면서 악행은 구조화되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하게 된 정치ㆍ사회적 배경이다.
"잔약한 체구의 처녀가 지난 6월 6일과 7일 부천서에서 저 무도하고도 야수적인 능욕을 당하고, 산산이 파괴된 인생의 절망과 겪어보지 않고는 누구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비통한 자기모멸감과 수치심, 그리고 출구를 찾을 길 없는 치떨리는 분노에 시달리면서 경찰서보호소에서 유치장으로, 다시 교도소의 감방으로 짐짝처럼 넘겨질 때에 순간순간마다 그녀의 뇌리를 무겁게 짓눌렀던 것은 오직 자기파괴와 죽음에의 충동, 그리고 한 시도 떠나지 않는 악몽 속의 가위눌림뿐, 그녀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던…."
이른바 '부천서 성고문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권인숙 씨의 성고문 정황을 변호인단의 〈고발장〉은 이렇게 통렬히 적시했다. 〈고발장〉은 다시 이어진다.
"저 나치즘 하에서나 있었음직한 비인간적인 만행이 이 땅에서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경악과 공분을 느낌과 아울러 인간에 대한 믿음마저 앗아가는 듯한 암담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단순히 음욕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성이 고문의 도구로 악용되어 계획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86년 6월 6일 새벽 4시 30분 경부터 2시간 반 동안, 그리고 7일 밤 9시 30분 경부터 2시간 동안 경기도 부천경찰서 경장 문귀동은 권양에게 성고문을 가하며 진술을 강요했다. 문귀동은 5ㆍ3인천사태 관련 수배자의 소재를 대라면서 권양을 성고문한 것이다.
86년 인천 5ㆍ3항쟁 이후 민주화 진영은 다양한 방법으로 5공 헌법개정 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정권안보차원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인천 5ㆍ3항쟁의 배후를 색출하는데 주력하면서, 이를 위해 구속ㆍ수배ㆍ고문 등을 자행하였다.
22세의 젊은 여성의 가냘픈 몸으로 시대의 불의, 제도와 공권력의 폭력에 불굴의 투지로 맞섰던 권양은, 6월 4일 경찰에 연행돼 성고문이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치욕을 당한 후 공문서변조 및 동 행사, 사문서변조 및 동 행사, 절도, 문서파손 등의 엉뚱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1년 6월의 형 확정판결을 받고 복역 중 당국의 7ㆍ6조치로 가석방되었다.
권양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선택된 소수에 드는 여대생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82년 서울대 가정대 의류학과에 입학한 그는 노동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대학 4학년인 85년 봄 스스로 학교를 등지고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에 있는 주식회사 성신이라는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허명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생산직 근로자로 위장취업을 했다.
대학출신들의 생산직 취업이 노동운동을 위한 위장취업이 규제되는 상황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남의 주민등록증을 변조해 사용했다.
그러나 권양은 이 회사에 오래 근무할 수가 없었다. 회사측으로부터 '위장취업'의 의심을 사게 되자 직장을 떠났다. 그러다가 6월 4일 밤 영장도 없이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어 성고문을 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