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농성 23일차, 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 씨
연정
"다 알자녀~"
3월 28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 콜텍 본사 앞 콜텍지회(민주노총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소속) 농성장에 가니 임재춘 조합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임재춘씨는 17일 째 정리해고 사과와 복직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이다. 투쟁을 시작한 지 4439일이 되는 이날, '기타를 던져라' 공연 때문에 다른 조합원들은 외부에 나가 있다고 했다.
"착잡해. 노동자들이 맨 날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라는 손 한번 안 쓰잖아. 일곱 차례 교섭했는데, 회사가 아무 것도 없이 왔어. 3월 7일에는 박영호 사장이 와서 교섭을 했는데도 아무 것도 안 갖고 온 거야.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끝장 선언 했잖여. 어떻게 됐든 끝을 봐야 된다 생각한 거지."
이인근 지회장은 이미 수차례 단식을 했고, 김경봉 조합원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재춘씨 밖에 할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장기화 되는 단식에 체중 감소와 함께 체력은 계속 떨어져 가는데,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수척한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늘 그랬듯이 기타 이야기만 나오면 재춘씨의 눈이 반짝이고 그의 말이 빨라진다. 재춘씨가 기타노동자로 살아온 지 36년이다. 그에게 기타노동자로 살아온 역사를 물었다.
"그냥 내리고 싶더라고"
재춘씨가 기타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3년이다. 공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동네 선배를 따라 의정부에 있는 통기타 만드는 성음악기에 입사했다. 재춘씨는 성음악기에서 나무로 기타에 들어가는 부자재를 만드는 성형라인에서 일했다. 회사 기숙사에 살면서 매일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일을 했고, 주말에도 무조건 일을 해야 했다.
"일요일 날 교회에 안가면 주차를 까. 성음이 기독교 회사거든. 거기에 불만이 있었지."
재춘씨는 어릴 때만 해도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착실하게 외우는 착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중학교 때 '교회 비리'를 알게 되면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성음악기에서 교회에 나가는 게 무척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1985년 당시 인천 대우자동차에 다니던 친구의 소개로 대우자동차에 입사 지원을 하게 된다.
"그때 삼익악기도 사람 뽑는다고 해서 거기도 이력서를 넣었지. 면접 시간이 2시로 똑같았어. (버스 정류장이) 삼익악기 다음에 대우자동차야. 삼익악기에 내려서 거기 들어간 거야."
재춘씨는 그렇게 대우자동차는 면접도 못보고, 삼익악기에 입사를 했다.
"그냥 삼익악기에서 내리고 싶더라고."
재춘씨의 기타 인연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날 만약 재춘씨가 삼익악기를 지나쳐 대우자동차 정류장에서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대우자동차) 안가길 잘했지. 그때 갔으면 나도 해고 당했지. 1750명 대량 정리해고 했잖아."
그날 그가 대우자동차에서 내렸다면 우리는 재춘씨를 콜텍 투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었을까? 대우자동차에서 해고가 되었다면 다른 일을 했을 거라니 하마터면 우리는 재춘씨를 못 만날 뻔 했다. 어찌됐건 기타와 인연을 맺는 재춘씨의 삶이 신기하기만 하다.
힘들어도 악착같이 하던 그런 시대
2001년 정리해고는 피했지만, 2007년에 그는 해고자가 된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비정규직보호법'이 만들어진 직후였다. 혹시, 박영호 사장은 '시대의 흐름에 맞게' 콜텍 노동자들을 해고한 후에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워 진정한 '꿈의 공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콜텍 해고노동자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그 꿈이 무산된 것은 아닐까? 재춘씨는 "우리 시대 사회가 그랬던 거"라고 했다.
이렇게 재춘씨의 기타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삼익악기에서는 콤파운드와 왁스를 섞어 전기기타 광택 내는 일을 했다. 성음악기에서의 경력이 있어 월급도 많이 받았다. 노동 조건은 전 직장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했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젊었잖아. 힘들어도 악착같이 하던 그런 시대였지."
삼익악기에서 1년 반 정도 근무한 재춘씨는 1986년 다시 고향에 내려온다. 성음악기에서 공장장 하던 사람이 계룡에 기타 공장을 만든다고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 회사가 콜텍의 전신인 덕영악기(덕영산업)다. 그리고 1991년 수출용 샘플 기타를 생산하던 덕영악기를 콜텍이 인수하면서 덕영악기 노동자들은 콜텍에 그대로 고용승계 되었다. 재춘씨는 그때만 해도 그것(그대로 고용승계 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재춘씨의 콜텍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콜텍 대전공장은 1994년부터 본격적인 흑자를 냈고, 1997년 IMF이후 환율 상승으로 수입이 크게 늘어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로 공장을 확장해서 이전했다. 회사는 나날이 성장해 갔지만, 재춘씨를 포함한 콜텍의 노동자들이 평일 오전 8시 30분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을 하고 토요일 격주로 일을 하는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재춘씨는 콜텍에서도 완성반 광택 일을 했다.
"기타에서 최고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광택 일이야. 사람 몸으로 때우고 해야 되는 거니께. 생산량은 계속 늘었어. 콜텍에서 최고 많이 만들 때는 하루에 350대 400대도 만들었지. 힘든 거는 너무 개인적인 시간이 없는 거? 생산 못하면 더 연장도 해야 되니까. 가족들하고 보내는 시간이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