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 7년후 1987년판화가 홍성담, 작가 윤정모, 교수 최권행
윤솔지
"사실 내가 나서서 한 것도 아니야. 최권행씨가 나를 엮어 놓은 거지. 외모도 마르고 곱상했는데 치밀한 사람이었어. '연락 중책'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숨거나 도망쳐야 하는 사람들의 은닉처를 담당했었어. 민청학련 당시 권행씨는 서울대 1학년이었지만 나이는 열아홉이었어. 고문도 많이 당하고 정말 고생했어."
실제로 최권행씨는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연루돼 내란음모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고초를 치른 그는 37년 만에 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올해 퇴임했다. 당시 이십대의 최씨는 밤새 먹지에 긁어 유인물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눠 명동과 같은 도심에 뿌리는 등 광주의 진실에 대해 알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 상황이 만만했던 것 같아. 나는 그제야 위안부 참상과 친일잔재에 대해 눈을 떠가고 있던 시점이었거든.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에서 작가 윤정모는 대중작가에 불과했어.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블랙리스트에는 내가 없었겠지. 당시 박효선, 윤한봉은 항상 수배범 1, 2번으로 거론됐어. '두 사람이 잡히면 사형, 이들을 숨겨준 사람은 은닉죄로 7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고 매일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로 살벌했어. 그런데 그때 최권행한테 연락이 온 거야. 그로 인해 처음으로 광주에서 온 그들을 마주하게 됐어."
나는 그 엄혹했던 시대에 광주항쟁이 어떻게 지속해서 알려질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왜냐면 많은 일이 당시에는 중요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기억 속에서 흐려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때는 매체도 발달하지 않아서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직접 손으로 유인물을 만들어야 했다. 만남도 조심스러웠으니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광주는 어떻게 기억될 수 있었을까?
"외신에 다 떠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묻힐 수가 없었어. 아무리 전두환 정권이 광주 시민들을 '폭도'라 하고 관련자들을 구속하는 등 심하게 억압했어도 다행히 언론의 힘이 기억을 잡아냈어. 그리고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국민도 기억의 끈을 놓지 않았고."
5년 후인 1985년에 엄마 윤정모는 <밤길>이라는 소설을 통해 광주항쟁을 세상에 알렸다. <밤길>은 광주항쟁 당시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던 김 신부와 시민군의 일원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요섭이 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서울로 탈출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김종욱 세종대 교수는 <밤길>에 대해 "광주항쟁을 본격적으로 그린 첫 작품이다, 작가는 광주항쟁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비극적인 투쟁을 지켜보기만 했다는 죄책감과 살아남았다는 미안함에 대해 속죄하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