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대 영정을 들고 있는 학생1991년에 명지대 1학년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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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6일 노태우 집권 4년 차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가 죽었다.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에 참석한 강경대는 경찰과 대치하던 중 시위자를 검거하기 위해 교내로 진입한 사복 경찰관인 백골단을 피해 정문 옆 허물어진 담장을 넘으려다 경찰에 붙잡혀 그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무자비하게 폭행당하고 방치되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학생들에 의해 즉시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한 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그즈음은 유난히 씁쓸했다. 1987년 유월항쟁이 끝나고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정권을 바꾸지는 못했다. 김대중·김영삼씨가 단일후보로 나오지 못했고 이듬해인 1988년 선거에서 노태우가 36.3%의 지지율로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다를 게 없었다. 군부독재의 쌍둥이 형제인데 선거에서 당선까지 되었으니 오히려 더 활개를 쳐도 정당하다는 식이었다. 부정부패는 심해졌고 강경 진압은 더 과격해졌다. 많은 젊은이가 분신·투신하며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젊은이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오로지 시대에 대한 고민의 반영이었어. 개인의 이익에 대한 틈은 전혀 없었어. 그 엄혹한 시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고, 그때는 자신들의 죽음만이 불씨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엄마 윤정모 작가는 젊은이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날 때마다 장례위원이나 진상조사위원을 도맡아했다.
'토끼몰이' 진압에 스러진 꽃다운 목숨
1991년 5월 25일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엄마를 따라 집회를 나갔다. 그날은 서울 각지에서 가두행진을 하다 퇴계로로 집회인파가 모여 마무리를 할 예정이었다. 퇴계로 대한극장 넓은 대로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은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3차 국민대회'라는 이름으로 전경, 백골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백골단은 하얀 헬멧을 쓴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 사람들이 제일 무서웠다. 이들은 속도가 무척 빨랐다. 집회하는 사람들을 잡아내 머리채를 잡고 곤봉으로 죽어라 때리며 짓밟곤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백골단은 가만히 있었고 우리도 마무리짓고 집으로 갈 마음의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그들이 예고도 없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백골단이 뛰어들자 전경들이 방패로 바닥을 '턱, 턱, 턱' 찍으며 빠르게 진압해왔다. 수만 명의 시민들은 혼비백산했다. 도망칠 곳은 퇴계로의 오래되고 좁은 골목들, 그 안의 오래된 저층 건물들뿐이었다. 저들은 밀리는 사람들 위로 최루탄을 계속 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한꺼번에 좁고 어두운 곳으로 도망가다 보니 앞쪽에서부터 사람들이 무너졌다. 그 위로 넘어지고 포개지고 깔렸다. 이제 내가 넘어질 차례였다.
'잡아! 잡아 기둥을!"
사람들이 한 팔로 기둥을 감고 다른 한 팔로는 우리들의 허리를 감았다. 다리는 허공에 떠있고 팔은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허리를 사람들이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다행히 더는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건물 안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골목에서 넘어져 다친 사람, 전경의 방패에 등이나 어깨가 찢어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말 그대로 '토끼몰이 방식'의 진압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존엄성은 무너졌다.
'시신탈취' 백골단에 맞서 김귀정을 지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