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1980년 5월 2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이 도로에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 어떻게 시민군으로 활동하게 됐나.
곽희성(아래 곽) : "우리 둘은 원래 알고 지냈던 사이었다. 19일 오전에도 둘이 같이 있었는데, 상무대 앞 도로 쪽에서 탱크 소리가 들렸다. 엄청나게 많이 올라오고 있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탱크가 지나가는 걸 볼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쟁도 아니고... 그렇게 계속 따라가다가 통합병원 앞에 탱크가 줄줄이 서있는 걸 보게 됐다."
양기남(아래 양) : "그날 계엄군하고 테이블 하나 거리 정도만 두고 마주할 정도였다. 그때 우리가 본 계엄군들의 얼굴은 시뻘건 상태였다. 눈알도 한껏 충혈돼 있었다. 이상했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던 80년 5월 18일, 광주 전역에 신군부의 병력이 배치됐다. 군인들은 학생, 시민을 가리지 않고 잡아들였다. 진압봉을 휘두르고 대검으로 찔렀다.
탱크, 군용기 등 본격적인 병력이 광주로 들어온 것은 다음날(19일)이었다. 오후 4시 30분, 광주고 앞길에서 김영찬(19세·조대부고 3년)이 대퇴부 등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계엄군의 총에 맞은 첫 사망자였다. 20일 새벽에는 얼굴이 짓이겨진 두 번째 희생자 김안부(일용노동자)가 발견된다. 20일, 다시 금남로를 찾은 두 청년은 계엄군에 의해 쓰러진 채 리어카에 실려 온 시신 2구를 목격한다.
양 :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왔던 게 21일이다. 아직도 생생하다. 오후 1시, 전남도청 옥상에서 느닷없이 애국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뒤이어 총성이 막 쏟아졌다. 도청 앞 집단 발포다. 시위대 내부 분위기도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도 대항해야 한다고, 총으로 무장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