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가릉
이승숙
39년이라면 긴 시간이다. 그동안에 수명을 다한 사람들은 강화에 묻혔을 것이다. 강도(江都) 시기에 죽은 왕과 왕비들도 그렇게 강화에 묻혔다. 고려산 자락에 있는 고려 고종의 홍릉을 비롯해서 석릉, 곤릉 그리고 가릉까지 모두 강화도 천도시기의 고려 왕릉들이다.
영원한 삶을 기원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덤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계층 간의 구별이 뚜렷했던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무덤을 통해서도 묻혀 있는 사람이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피장자(被葬者)의 신분에 따라 무덤의 명칭이 달랐으니 능, 원, 총, 분, 묘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신분에 따른 무덤의 명칭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왕세자와 세자빈 또는 왕세손과 세손빈의 무덤에는 '원'을 붙인다. 왕족이라 하더라도 왕위와 관계없는 이는 일반인과 같은 '묘'라 불리었다. 규모로 봐서는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그 주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총'을 붙인다. 또 발굴이 되지 않아 무덤으로만 추정되는 것들을 통틀어서 '분'이라고 한다.
가릉은 고려 24대 원종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의 외할아버지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이고 외증조부는 최충헌이다. 최우는 정실부인에게서 딸 한 명밖에 얻지 못했는데 그이가 바로 가릉의 주인인 순경태후의 어머니이다.
순경태후의 아버지는 김약선으로 그는 당시 임금이었던 고종의 신임을 듬뿍 받던 문신이었다. 이런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순경태후 김씨는 요즘 말로 해서 '금수저' 중의 '최고 금수저'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