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앳된 시골 소녀는 마음이 설레었다. 혼담이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수줍은 듯 얼른 자리를 피했지만, 어떤 사람일까 마음에 그려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님이 내게 꼭 맞는 신랑을 택해주실 거라 굳게 믿으며 마냥 분홍빛 꿈에 부풀었다.
"난리다, 난리가 났어. 어서 피난 가야 해!"
마른 하늘에 웬 날벼락인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소녀는 혼담을 뒤로하고 짐 보따리를 메고 부모님을 따라 피난길에 나섰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피난민 행렬. 국군의 인도를 받으면서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혹시라도 밤길에 서로 헤어질까 줄을 부여잡고, 지겹도록 걸어 남으로 남으로 포항까지 내려갔다.
때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때론 마구간에서 소와 함께 잠을 청했다. 따발총 소리에 놀라 아무데나 머리를 처박는 사람들, 대포 소리에 혼비백산해서 젖먹이를 번쩍 쳐들어 포탄을 막는 이들, 밥상 머리에 포탄이 떨어져 몰사하는 일가족, 부모를 잃고 울고 헤매는 아이들, 소녀는 상상도 못해본 끔찍한 광경을 일상으로 목격하면서 몸서리 쳤다.
그 와중에 꿈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드디어 적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도망치는 패잔병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소녀는 발길을 재촉해 그리운 고향 상주로 돌아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중매쟁이 배씨네가 찾아와서는 "아유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이제야 돌아왔구먼. 색시 빨리 내놔야지. 빨리 하자고" 성화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소녀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모님이 택해준 낯선 사람과 길일을 택하여, 설을 앞두고 서둘러 식을 올렸다. 첫날밤에야 비로소 신랑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고는, 평생의 배필로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전쟁으로 경황없는 가운데도, 친정 부모님은 신혼 살림을 정성껏 장만해 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넌방 한 켠을 지키고 있던 장롱은 그때 준비해 온 것이다. 한번은 "엄마, 장롱이 낡았어. 새 장롱 샀으니까, 이건 버려"라고 했더니,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이 장롱이 어때서. 버리긴 왜 버리니?" 생각해보니, 엄마에게는 부모님의 정성, 그 숨막히던 시절에 대한 애환 그리고 자신의 손때가 배어 있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몇 해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손수 불태워버리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무려 육십여 년이나 고이고이 간직해오셨다. 그러니 난 눈치코치도 버르장머리도 없었던 셈이다. 그 후론 아무도 낡은 장롱이라고 깔보지 못했다.
신혼의 단꿈도 잠시,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믿고 의지하던 신랑이 전쟁터로 나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두 달 남짓한 신혼인데,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로 떠나 보내야만 했다. 다리에 힘이 쭉 빠져 그냥 주저앉고 말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1951년 1.4 후퇴! 중공군이 밀물처럼 쳐들어와 서울을 점령해버린 후라, 젊은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군대에 가야 했다. 신랑을 떠나 보내고 나서, 피난길에서 포탄에 맞아 절규하던 이들의 얼굴이 어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정화수를 떠놓고 제발 살아만 주기를 소원하고 또 소원했다.
농사밖에 모르던 청년은 쟁기 대신 총을 잡고 사람 잡는 연습을 했다. 제주도에서 속성으로 훈련을 마치자마자 배를 타고 강원도 고성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의무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울창한 숲으로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깊은 산속에 진지를 구축하고, 고지를 앞두고 적과 마주했다. 낮에는 결사적으로 싸워 고지를 점령하고, 밤에는 밀려 퇴각하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잘려 나간 팔다리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이들, 흘러나오는 창자를 터진 배속으로 주워담는 이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생지옥이었다. 전우들은 죽어가고, 울창했던 숲은 민둥산으로 변해갔다. 총탄이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의무병! 의무병!" 숨 넘어갈 듯 다급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사방으로 들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어디선가 날아든 파편에 온몸이 할퀴고 찢어졌다. 그럴수록 청년은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 죽기살기로 싸웠다.
쾅-쾅-쾅-
날카로운 뭔가가 폐부를 물어뜯고 지나갔다.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영영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갔다. 부모님이 보고 싶고, 아내가 그리웠다. 이것으로 끝인가? 이제 겨우 이십인데...
아침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고 빌던 어린 신부는 전쟁이 속히 끝나고 신랑이 돌아올 날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다리던 신랑은 아니 오고 군 전령이 찾아왔다. 저승사자? 설마 그럴 리야, 그럴 리가 없어. 하늘이 노래졌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저승사자가 무서운 입을 열었다. "김oo 댁이지요?" 머뭇머뭇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부상을 입고 울산 야전병원에 있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래도 살아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린 신부는 신랑을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거기가 어딘데 네가 찾아갈 수 있겠니?"
"물어 물어서 찾아가 볼게요."
"넌 글을 읽을 수 있으니 그래도 나보다는 낫겠구나. 그래 한번 가보거라."
동네 야학에서 틈틈이 익힌 글 공부가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어린 신부는 겁도 없이 무작정 홀로 길을 나섰다. 짐 보따리를 챙겨 삼십 리 길을 걸어서 상주 버스정거장에 도착해 보니, 울산 가는 버스는 없고, 버스마다 가는 곳이 달라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모를 땐 물어 보는 게 상책이렷다.
"어르신, 울산 가려는데 어찌하면 되오"
"허, 울산 말이오. 그 참."
딱하다는 말투였다. 잠시 생각하더니 "아~ 경주 가는 분이 있던데, 내 찾아줄 테니 따라가시오. 경주에서 또 울산 가는 동행을 구하면 되겠구려"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경주에 도착했지만, 밤은 깊어가고 잠들 곳은 마땅찮았다. 마침 지나가는 처자에게 물었다.
"내가 사정이 이만저만한데, 어디 잠잘 데 좀 없겠소?"
처자는 한참 망설이다가 답한다. "내가 이야기해줬다 하지 말고, 저~ 집으로 가보세요. 나그네가 찾아오면 그냥 내보내지 않는답니다." 들은 대로 그 집을 찾아가서
"이만저만해서 왔습니다. 하루 밤 묵을 수 있을지요?" 묻자 곧 생각하던 주인장은 답했다.
"저희 어머니를 우리 방에 같이 모실 테니, 불편하겠지만 어머니 방을 쓰세요."
그때 그 처자가 눈을 찡긋하면서 들어왔다. 아마도 허드렛일을 하면서 더부살이하는 처지인 듯했다. 어린 신부는 자리에 눕자마자 곤해 골아 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니 주인장이 밥을 챙겨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침 울산 가는 차량이 있다면서, 타고 갈 수 있게 주선까지 해주었다. 감사하다며 거듭거듭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나려 하자, 주인장은 먹다 남은 밥과 찬까지 싸주면서 출출할 때 먹으라 했다. 복 있을진저, 우리 엄마를 도와주신 분들이여!
울산 야전병원! 청년은 응급조치만 받고 곧바로 울산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왔다. 태화강변에 급조한 병원이지만 전쟁 와중에 그럭저럭 쓸만한 병원이었다. 청년은 미 군의관의 집도로 수술을 받고 죽음을 간신히 넘기고 있었다. 어린 신부가 도착했을 땐, 환자들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여기저기 신음소리로 아비규환이었다.
그토록 그립던 신랑이 처참한 몰골로 병상에 누워있었다. 멀쩡했던 신랑이 성한 데 하나 없는 몸으로 끙끙대고 있었다.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상처 부위를 살펴보니, 구더기가 기어 다니고 엉망이었다. 손이 부족하고 날씨마저 후덥지근하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서럽고 서운한 마음에 가슴이 미어터졌다. 상처를 보살펴주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가슴에 담아온 이야기를 나누기엔 허락된 면담시간이 턱없이 짧아 야속하기만 했다.
"으앙 으앙." 결혼 5년 만에 기적이 태어났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고, 청년이 건강을 회복하고 드디어 첫 아이를 낳은 것이다. 둘의 만남도, 살아남은 것도 다 기적이다. 그러므로 "으앙 으앙"은 기적의 소리다. 그것은 혼돈과 전쟁과 어둠을 헤치고 나온 태초의 소리요, 우렁찬 생명의 울림이요, 맑고 순결한 자연의 노래요, 마음껏 외치는 자유의 향연이다. "으앙으앙" 하고 태어났으면, "으앙으앙" 용솟음칠지어다. 태초의 모습 그대로 순결하고 자유롭고 힘차게 살어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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