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폴리스> (마르잔 사트라피 저, 박언주 옮김, 휴머니스트, 2019)
송주연
낯선 세계에서의 혼란
마르잔이 14살이 되었을 때, 가족들은 마르잔을 오스트리아로 유학보낸다. 떠나는 마르잔에게 할머니는 "늘 품위를 잃지 말고, 네 스스로에게 정직해지도록 해라(155쪽)"라고 당부한다.
마르잔은 오스트리아에서 실로 오랜만에 원하는 옷을 입고 원하는 노래를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한다. 하지만,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는 오히려 혼란으로 다가온다.
그들과 비슷해지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나의 문화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나의 부모님과 나의 뿌리를 배신하고, 내 것이 아닌 놀이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199쪽)
다 잊고 싶었고, 내 과거도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내 무의식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200쪽)
결국 마르잔은 어느 날 파티에서 자신을 '프랑스인'이라고 소개하고 만다. 하지만, 스스로를 속일수록 공허해지던 마르잔은 오스트리아 유학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마침내 "난 이란 사람이고 그게 자랑스럽다구!"(203쪽)라고 외친다.
나는 1년 만에 처음으로,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할머니 말씀이 무슨 뜻인지 똑똑히 깨달았다. 나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으면, 그 어디에도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3쪽)
그 후 마르잔은 자유분방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남자친구도 사귀지만 마약에 빠지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잔은 남자 친구가 마약 거래에 자신을 이용해왔음을 알아차리고 이별을 한다.
마침 돈까지 떨어진 마르잔은 노숙을 할 정도로 방황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정체성 혼란, 사랑했던 남자와의 이별, 지독한 고독 속에서도 삶의 의지는 내려놓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나
결국 마르잔은 살기 위해 가족이 있는 이란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무기력감은 점점 심해져갔다. 어느 날 그녀는 친구들과 자신이 더 이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오스트리아에서의 자유분방한 삶에 대해 '창녀와 다른 게 뭐니?'라고 반문하는 친구들. 자신의 삶의 경험을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마르잔은 깊은 절망에 빠져든다.
내게 닥친 불행은 한마디로, '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란에서는 서양 여자였고, 서양에서는 이란 여자였다. 정체성이라곤 없었다.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281쪽)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억압에도, 홀로 지내는 외국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살고자 했던 그녀. 그런 그녀가 삶의 의지를 상실한 그 순간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나의 경험이 존중받지 못하고,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했을 때, 마르잔은 자신의 정체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자살을 시도하고 만다.
다행히 마르잔은 우울증 약 한 병을 들이키고도 죽지 못한다. '난 죽을 팔자가 아님'을 알게 된 마르잔은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해(282쪽)'라고 다짐한다. 운동도 하고, 대학에서 그래픽 아트를 공부하고,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사회는 여전히 억압적이지만, 그녀는 그녀만의 자유 의지를 다시 살려나간다.
우리의 공적인 행위와 사적인 태도는 정반대였다. 이런 불균형과 격차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 분열을 겪고 있었다. 겉으로라도 균형을 찾기 위해, 우리는 거의 매일 밤 파티를 벌였다. (314쪽)
이렇게 다시금 억압 속에서 자유를 누릴 방법을 찾기 시작한 마르잔은 자신만의 독특하고도 자유로운 삶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난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이거였다. 마르잔이 겪은 그 모든 폭력과 억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것, 즉 정체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르잔이 그랬듯, 모든 사람들의 삶에는 제각각 살아온 공간과 시간의 역사가 새겨진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부터 각 개인의 독특한 경험까지 한 사람이 살아낸 고유한 역사들은 그 사람을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그런데 그 특별함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결국 정체성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이럴 때 사람들은 살고 싶은 본능을 저버리게 된다. 반면, 마르잔이 죽음에서 깨어나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아 한다'라고 다짐했듯, 나만의 독특함을 존중할 때 삶의 의지는 다시 살아나고 저항할 힘을 얻는 법이다.
책을 덮은 후에도 길게 여운이 남았다. 난 나의 독특함을 존중해 주었던가. 누군가의 특별한 정체감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한 적은 없었던가. 떠오르는 이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마다의 역사를 간직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페르세폴리스
마르얀 사트라피 (지은이), 박언주 (옮긴이),
휴머니스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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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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