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이던 1947년 7월 19일. 서울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우국지사 한 분이 암살범의 손에 쓰러집니다. 조국 독립과 좌우합작을 위해 평생을 바친 우국지사 몽양 여운형 선생인데요. 약산 김원봉은 몽양 선생 암살 뒤,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며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제에 투옥당하고 탄압받으면서도 독립운동을 접지 않았던 몽양 여운형. 그는 왜 해방된 조국에서 동포의 손에 숱한 테러를 당하다 끝내 암살됐을까요? 일본의 경제 도발 국면에 다시 생각해보는 몽양 여운형의 삶을 최유진 기자가 보도합니다.
83년 전인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 대한의 남아 손기정이 2시간 31분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합니다. 이를 처음 보도한 국내 신문 조선중앙일보. 손기정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채 보도합니다. 이어 보도한 동아일보와 달리 조선중앙일보는 끝내 폐간됩니다. 일장기 말소 보도를 주도한 인물은 당시 사장이던 애국지사 몽양 여운형. 몽양은 올림픽 출발 전 이미 "비록 가슴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는 말을 들려줄 정도였습니다.
그 몽양 여운형 선생이 72년 전, 이곳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합니다.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지만, 극우 테러리스트 한지근의 손에 쓰러집니다. 시해당하기 전까지 몽양은 곤봉 구타와 침실 폭파 등의 숱한 테러에 시달리는데요. 일제가 물러난 자리를 고스란히 틀어쥔 친일파가 우익이란 이름으로 자행한 겁니다.
몽양이 시해당하던 날 아침에 쓴 편지에 이 같은 정황이 잘 드러납니다.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 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소이다." 단정을 추진하던 세력과 친일파는 몽양의 무엇이 두려워서 그를 암살해야 했을까? 평생을 조국독립과 좌우합작, 남북통일을 위해 몸 바친 진정한 애국정신입니다. 몽양의 애국정신은 이미 청년 시절부터 남다르게 싹텄습니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갑니다. 쓰러져 폐허가 된 것을 양평군청이 말끔히 복원해 놨는데요. 서울로 올라가 신학문을 접한 그는 21살 때 부친상을 당합니다. 3년 상을 마친 청년 여운형은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땅도 나눠줍니다. 민족독립에 앞서 이미 인간독립, 즉 평등 정신을 몸소 실천한 겁니다. 생가에는 몽양의 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며 탐방객을 맞이합니다.
"국내에서 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건국동맹 같은 걸 이렇게 준비하시면서 건준위가 또 전국적으로 세력이 많고 자치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잖아요. 그런데도 해방한 지 2년 만에 돌아가시게 돼서 그분이 도대체 어떤 삶을 사셨는지 궁금하던 차에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들르게 됐습니다. 생가도 보존되어 있고 밑에 기념관도 잘 되어 있어서 많이 찾아와서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이행란 (경기 시흥시)
몽양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납니다. 1918년 1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나오자 힘을 받습니다.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만든 뒤, 파리 강화회담에 김규식을 단장으로 대표단을 보냅니다. 이 소식은 1919년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의 불을 지핍니다. 3.1운동 뒤 상해임시정부 수립으로, 김규식 일행은 임시정부 공식 대표단이 됩니다.
"파리강화회의에 우리가 일본에 식민지가 되어서 고통당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우리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리려면 대표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몽양 여운형 선생께서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이란 걸 만들었어요. 거기에 대표단으로 우사 김규식 선생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김규식 선생님이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 이런 말씀 하신 거예요. 내가 파리에 간들 세계 많은, 특히 강대국 나라들 대표들이 김규식이 누군지 알겠느냐, 그러니 내가 가서 파리강화회의에 활동하려고 해도 우리 조선인들이 자주독립을 원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이런 말씀 하셨어요. 그러면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나야 한다 이런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에 여운형 선생은 동의하고, 김규식 선생을 파리로 떠나보낸 뒤에 장덕수 등 여러 분들을 일본 도쿄에 보내서 2.8 독립선언을 하도록 합니다. 장덕수 선생을 비롯한 여러 분들이 노력을 해서 동경에 일본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한 것이 국내로 알려지면서 장덕수 이런 분들이 그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와서 손병희 선생 등 여러분들을 만났고... 3.1 독립운동이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단 걸 알게 됐어요." -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일제는 3.1운동의 배후로 몽양을 지목하고 동경으로 불러들여 회유합니다. 그러나 몽양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며 오히려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습니다. 이어 현대 중국의 초석을 다진 손문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합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통한 반제국주의 즉 대일투쟁에 나섭니다. 하지만, 1929년 일제에 체포돼 대전형무소에서 3년형을 삽니다.
출옥 뒤 국내에서 언론 활동 등으로 투쟁하던 몽양은 1940년부터 동경을 다섯 차례 오갑니다. 일제가 중국 모택동은 물론 장개석과도 가까운 몽양과 접촉하려 했기 때문인데요. 몽양은 회담 중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졌음을 예견합니다. 국내로 돌아와 이곳 생가를 기반으로 자생적인 건국 조직을 만듭니다. 외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그렇게 탄생합니다. 전국에 지부를 결성한 건국 준비위원회. 일제 패망 뒤, 치안 공백을 딛고 질서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건국준비위원회 덕분입니다.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된 다음에 국내에 비밀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드신 것이 '건국동맹'이었습니다. 그것은 해방되기 직전인 1944년에 결성이 됐어요. 농민운동, 지식인 운동 중심으로 했던 거죠. 그러자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해방되고 나서도 일본군, 일본 경찰이 그대로 있었어요. 그들은 총, 칼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조선 사람들이 나서면 언제 살육을 벌일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몽양 여운형 선생은 뜻을 같이하던 분들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건준을 구성하게 됐고, 그 건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치안을 유지하고 서울같이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그런 길을 마련했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감옥에 갇혀있던 독립운동가 등 많은 정치범을 석방했어요. 이 일을 그 당시 조선총독부와 조선 사람들 대변해서 몽양 선생이 교섭했던 겁니다. 그렇게 아주 순조롭게 치안을 유지하면서 독립 정국의 질서를 잡아갔던 거죠. 그게 바로 건준이 했던 일입니다." -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모스크바 3상 회의 의결에 따라 한국독립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1946년 열립니다. 이승만과 친일파는 우익과 반공이란 이름 아래 남한 단독정부를 추진합니다. 몽양은 우사 김규식과 손잡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에 이은 좌우합작 운동에 나섭니다. "현재 통일의 암은 신탁이 아니라 결국 각 진영의 이해관계다." 몽양은 좌익이나 우익 진영논리를 타파한 통일 정부 수립을 열망했습니다. 나아가, 한국의 미래를 위해 미소영중 4강 '등거리 외교'론을 폈습니다. 민족의 이익을 뒤로한 채, 남한 단독정부로 기울던 미국과 이승만, 그리고 친일파. 이들의 눈에 몽양이 어떻게 비쳤을지는 자명합니다.
"해방됐을 때 해방정국을 바라보는 몽양 선생이나 애국자들의 마음은 몹시 착잡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왜냐면 패전국인, 전범국인 일본은 미국이 한 나라가 점령했잖아요. 그런데 이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해서 두 나라가 우리를 점령했단 말이에요. 미국과 소련이 남북 양쪽을 분할 점령한 속에서 미국과 소련은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치 세력을 남북한에 따로따로 양성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분단은 더 고착화되고, 남북 간에 갈등과 대립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단 말이죠. 그래서 몽양 선생은 건준을 통해서 하나의 정부를, 비록 신탁통치를 받긴 하지만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 좌우합작 운동이란 걸 벌였어요. 좌우가, 너는 좌고, 나는 우니까 따로 정치 세력을 만들어서 정부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좌우가 머리를 맞대고 합의를 해서 하나의 정부를 만들자, 그게 좌우합작 운동이었어요. 연합운동이죠. 이러려고 하니까 미국이건 소련이건 영국이건 중국이건, 우리는 어느 나라와만 특히 가깝거나 어느 나라는 특히 멀거나 적대하는 그런 정책을 하지 말고 등거리 정책을 세워나가자, 등거리 외교 노선을 세워나가자 그런 주장을 하셨던 거죠." -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서울 종로구 계동, 여운형의 서울집텁니다. 1947년 폭파돼 지금은 표석으로만 남았는데요. 폭파 범인은 친일파와 한 통 속이던 우익 테러리스트 백민태였습니다. 여운형 선생이 암살되고, 집도 폭파되자 몽양의 가족은 월북을 택합니다.
"해방되고 나서 그렇게 자신을 좌우 양쪽에서 죽이려고 대들 때 이런 말씀을 했어요. 혁명가는 편안히 침대 위에서 죽는 사람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 말씀을 했어요. 당신 자신이 멀지 않아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란 걸 너무 잘 아셨어요. 그런데 당신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들이 주로 친일파들이었거든요. 그러면 당신이 죽은 다음에는 그 따님 셋을 비롯한 자녀 여럿, 여기서 살 수가 없이 자기를 따라서 또 다 죽임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그래서 자녀들에게 나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너희들은 내 뜻을 다음에 이어가려면 친일파들이 큰소리 못 치는 북쪽으로 가서 일단은 목숨을 부지해라, 그런 뜻으로 보냈어요." -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걸며 일제와 싸운 민족 지사와 가족들. 해방 조국에서 대접받기는커녕, 일제를 대신한 친일파에 탄압받습니다. 몽양 여운형과 그 가족만이 아니죠. 이육사의 가족들, 약산 김원봉도 마찬가집니다. 최근 자행되는 일본의 경제 도발은 일본의 본질을 새삼 일깨워 줍니다. 반공 매카시즘 아래 독립투쟁 성과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죄인이 돼야 했던 독립지사들. 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진정한 독립과 극일의 출발점입니다. 단비뉴스 최유진입니다.
(영상취재, 편집 : 최유진 / 앵커: 임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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