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프리들런드의 소설 <늑대의 역사>는 성장 소설의 공식을 거부한다.
아케이드
그러나 에밀리 프리들런드의 소설 <늑대의 역사>는 그런 성장 소설의 공식을 거부한다. 여름과 겨울, 두 계절을 넘나드는 동안 열 다섯 소녀에게 일어난 믿을 수 없이 기묘한 사건들은 그에게 해소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지만 그는 그것을 극복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어른이 된다. 스물 여섯을 넘어 서른 일곱이 될 때까지.
대개 순진하고 착한 성정으로 나오는 외톨이 '소녀' 주인공은 그러나 이 소설에서만큼은 소아성애자로 의심받는 교사 그리어슨을 유혹하기도 하고 돌보는 아기를 침대에 내려꽂기도 하는, 영악하고 괴물같은 아이로 등장한다.
'착한 소녀'에 익숙한 독자들은 속수무책으로 혼란과 메스꺼움을 느끼고 말테지만 사실 독자가 익숙함을 느꼈던 그 이미지야말로 '소녀'를 박제하고 상상력을 결핍시킨 것이 아니었던가.
'나'를 뒤흔든 또 하나의 사건은 '나'가 레오와 페트라 부부의 베이비시터가 되면서 일어난다. '나'는 네 살 짜리 폴을 돌보면서 부부 사이에 흐르는 어떤 불안과 긴장을 감지한다.
과할 정도로 남편 레오에게 순종하는 페트라,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는 말로 아내를 통제하는 레오의 기묘한 관계는 끝내 아들 폴을 방치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파국을 가져온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페트라가 '가부장'이란 말 뜻에 대해 '부당하게 모든 것을 도맡아 하려는 사람이지'라고 풀이한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소설이 어린 '나'의 시각으로 쓰인 것을 감안한다면 페트라와 레오, 그리어슨 교사는 '실패한 어른'들이다(심지어 소설의 처음에서 작가는 교사 한 명을 발작 증세로 죽여버리기까지 한다). 의미는 알았으나 깨닫는 것에 실패하고, 평등한 부부 관계를 만드는데 실패하고, 미성년은 보호해야 한다는 법을 지키는 데 실패한다.
이 소설에 완벽한 어른, 믿을 만한 어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려고 작가가 선택한 건 '연민'이 아니라 '비참함'과 '더러움'이다. 작가는 어른이라는 말에 어떠한 환상도 존경도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작정한 듯하다.
소설은 열 다섯, 스물 여섯, 서른 일곱의 '나'를 번갈아 보여준다. 열 다섯일 때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과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들은 그러나 스물 여섯, 완연한 어른이라고 생각되는 서른 일곱이 되어서도 해소되지 못한다. 상처는 그대로 흔적을 남기고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소녀가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이 작품을 성장 소설의 문법으로만 읽어야 할까? 이 소설은 마음을 황량하게 한다. 주인공에게마저 연민의 시선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시시하고 더럽기까지 한 어른의 세상을 어떠한 변명도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 모두가 나쁘고 모두가 실패했다. 어른이라는 건 그 실패한 인간들을 부르는 또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늑대의 역사
에밀리 프리들런드 (지은이), 송은주 (옮긴이),
아케이드, 2019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감각은 날카롭게, 글은 따뜻하게 쓰고 싶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