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 입구여느 신사와는 달리 입구에 큼지막한 영어 팻말이 세워져 있다. 찾아간 날도 서양인 관광객으로 북새통이었다. 그들을 위한 배려일까.
서부원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은 정치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이곳을 찾아 참배하곤 한다. 그들이 전범들의 위패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건, 우리에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는 분노가 치밀었다가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해왔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하나의 외교적 관행이자 공식이 된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들으면 귀를 씻어야 하는' 그런 이름이 되었다.
도쿄에서 근 10년을 산 제자도 야스쿠니 신사엔 단 한번도 가본 적 없다고 했다. 되레 '우리가 전범들 앞에서 제사 모실 일 있느냐'며 짐짓 나무라기까지 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를 메이지(明治) 신궁과 함께 한국인이라면 절대 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야 하는 이유
그런데도 야스쿠니 신사는 도쿄에 왔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일본인의 속내를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자, 일본 군국주의의 발원지이며 극우 세력의 총본산으로서 그들의 논리를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하지 않는가.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시설이라기보다 군사시설에 가깝다. 1869년 메이지 일왕에 의해 세워질 당시부터 에도 막부와 싸우다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시설이었으니, 신사로 불리긴 해도 일본의 종교인 신도(神道)와 직접적 연관이 없다. 곧 일왕이 직접 참배하는 유일한 신사다.
여느 곳과는 달리 입구에 육중한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동상의 주인공은 일본의 근대 육군을 창설한 오무라 마스지로(大村 益次郞)다. 메이지 유신 10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모노를 입고 일본도를 쥔 채 참배객이 드나드는 길목을 응시하고 있다.
동상을 지나면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강조한 영어 팻말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이곳의 의미를 알 길 없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옷깃을 여미게 될지도 모르겠다. 신사 곳곳에는 한국어가 병기된 안내판도 세워져 있는데 얄궂게도 추모와 봉헌을 권하는 내용이다.
순간 정적을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 당시 입었던 흙색 군복 차림의 노인 두 명이 요란한 군홧발 소리와 함께 신사를 향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욱일기를 들고 다른 한 사람은 어깨에 총을 멨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신사 관리인은 머리를 숙여 그들의 '노고'에 예를 표한다. 낯설고 이색적인 모습에 관광객들은 재미있다는 듯 연신 그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광포한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가 마치 관광 상품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다.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그 상징성에만 있진 않다. 신사의 부속 기관인 유슈칸(遊就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전쟁기념관과 같은 곳으로, 명실공히 일본의 역사 왜곡 진원지이자 일본 극우 세력의 본향이다.
우리 돈으로 만 원이 넘는 유슈칸의 입장료가 턱없이 비싸고 아깝긴 하다. 그러나 전시된 유물과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노라면,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를 넘어 저들의 어처구니없는 역사 인식을 논박할 힘과 지혜를 얻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된다.
유슈칸은 일본 국수주의라는 언사 정도로는 담아낼 수 없는 명명백백한 파시즘의 공간이다. '침략'이 '출병'으로 표기된 건 차라리 애교다. 수많은 전범이 죄다 전쟁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 같은 전범 국가였던 독일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설이다.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전쟁터에서의 '미담' 사례를 읽고 나니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소년 이승복 이야기가 겹쳐졌다. 미담이라고 해봐야 일왕을 위해 목숨 바쳤다는 게 전부다. 그들이 남긴 유서에는 하나같이 일왕을 위해 죽어서 행복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비록 죽을 테지만 영광스러운 죽음이니 슬퍼하지 말라'며 자식이 부모를 다독인다. 어린 소녀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 오빠'들을 위해 쓴 위문 편지가 새겨진 일장기도 있다. 국기 위에다 눌러쓴 위문 편지는 일본인에겐 가슴 뭉클할지 몰라도 내겐 섬뜩한 공포 그 자체였다.
유슈칸 전시실 벽에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라는 일본어 글귀가 또렷하다. 욱일기를 배경으로 한 이 한 문장을 통해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제국주의의 민낯을 본다. 과거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로서 '잘 나가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학사관을 극복하자는 취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압권은 '전쟁 영웅'들의 영정 사진과 유품이다. 그들은 태평양 전쟁 직후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A급 전범들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할복을 통해 자결한 이들을 추모하자며 안경과 시계, 펜 등 시시콜콜한 그들의 유품까지 별도로 전시하고 있다.
우리에겐 기막힐 노릇이지만 유슈칸을 둘러본 일본인들에겐 가슴을 뛰게 만드는 듯하다. 마지막 전시실에 놓인 방명록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제자의 도움을 받아 방명록에 적힌 일본인들의 유슈칸 방문 소감을 일기장 들추듯 읽어보았다.
"과거 우리가 일으켰던 전쟁에 대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인이라면 반드시 유슈칸을 찾아와야 한다. 일본인인 것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