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의 구호였던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권경원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기포(起包) 장소가 무장인가, 백산인가를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논란이 일었다. 과거에는 백산설이 정설처럼 굳어졌는데 근래에는 무장설이 더 공감을 받고 있는 편이다.
1차 기포의 장소가 무장이라는 논거로서는 ①<전봉준공초 초초(初招)>, ② '전봉준 판결선고서'에 무장에서 기포했다는 기록, ③<취어(聚語)>에 실린 '무장동학배포고문', ④<오하기문(梧下記聞)>, P.72의 기록, ⑤<수록(隨錄)>의 일지, ⑥박문규의 <석남역사소설 - 박씨정기역사>, P.10 (이 필사본은 『한국학보(71)』부록, 일지사, 1993), ⑦김방선의 <임하유고(林下遺稿)>의 기록이 제시되고 있다. (박맹수, <사료로 읽는 동학농민혁명(11) : 전라도 무장현의 동학농민군 전면기포에 대하여>, ≪문화저널(60)≫1993년 5월호, 전주 : 전북문화저널사, PP.27~2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