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조약 당시 진무영의 훈련장에서 일본군대가 군사 훈련을 하고 있고, 이를 강화부민들이 구경하고 있다.
이승숙
정부군이 변변히 무장도 없는 오합지졸의 동학농민군에 참패한 이유를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조선의 군대는 19세기 초부터 정번(停番)으로 사실상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81년부터 부분적이지만 일본식으로 훈련을 받았고, 다시 중국식으로 훈련을 받다가 또다시 미국식으로 훈련을 받는 민족적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것은 민씨 정권이 스스로 불러들인 결과였다.
또한 군내부에서는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의 대립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당시 서울 안의 도시빈민 문제와 연결되어 1882년에 이른바 임오군란이라는 군인폭동이 일어나는 동기가 되었다. 이런 사정이니 만큼 장비는 최신식으로 갖추어져 있다고는 하나 불타는 투지는 바라기 힘들었다.
이와는 달리 농민군은 싸우고자 하는 투지에 찬 사람들로 뭉쳤고, 황토재 전투에서의 승리로 사기가 절정에 달했다. 뒤에 경군과 농민군 간에 벌이게 될 장성 황룡촌 전투는 싸우기 전부터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또 여기서, 왜 농민군이 정규군을 대신하여 조선을 외세로부터 지키기 위해 반침략투쟁을 벌여야 했는지 그 해답의 실마리를 볼 수 있다. (주석 9)
주석
6> 신복룡, 『개정판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173쪽, 선인, 2006.
7> 『동학도종역사(東學道宗繹史)』, 124쪽,『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1)』,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3.
8> 최현식, 앞의 책, 61~62쪽.
9> 오윤, 앞의 책,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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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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