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학농민군들. 황룡전적지 기념탑에 새겨진 부조물이다.
이돈삼
김개남의 고민은 깊어갔다.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하고 국왕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항일봉기가 자칫 종묘사직은 물론 국가의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런지 모르고 무엇보다 전봉준 세력과 의견의 차이를 좁히기 어려웠다. 김개남은 8월 하순부터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이 시기의 상황을 일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월 25일 임실을 거쳐 남원에 김개남군 진입.
8월 27일 남원 집합 격문을 보냄.
8월 27일 일본순사 3인이 천안 일대의 동학 정탐 보고.
8월 27일 일본 총영사가 동래부사의 동학 비호문제 보고.
8월 27일 일본 『시사신문』 태봉병첨부 다케노우치 대위 피살 보도.
8월 28일 경상도 예천의 동학농민군 읍내 공격.
8월 29일 경상도 안동 구원병 예천 도착.
8월 29일 일본군 문경 석문(石門)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 경상감영 남영병.
9월 1일 김인배 대접주 하동 공격을 위해 기포.
9월 4일 강원도 동학농민군 강릉 점령.
9월 5일 경상 성주 읍내 동학농민군에게 점거.
9월 9일 경기 동학농민군 죽산ㆍ안성 관아 점령.
9월 9일 전라도 금구의 동학농민군 고산 관아 점령.
9월 10일 전봉준 재기병 통문을 발송하고 삼례대도소 설치. (주석 4)
주석
2> 『남원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41쪽.
3> 정인보, 「해학 이공 묘지명(海鶴 李公墓誌銘)」, 『사료총서』8, 264쪽.
4> 신영우, 앞의 책, 60~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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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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