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영 작가와 아내 정숙재 씨가 불교 경전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예서로 작업한 10폭짜리 병풍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뉴스사천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그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을 바라보며 문득, 그는 어떻게 서예를 시작 하게 됐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60년 동안 계속 이 지역에서 쭉 살았어요. 포인(浦人)이라는 호도 삼천포 할 때 '포'하고 사람 '인'자를 써서 고향 색이 드러나게 지었어요. 말 그대로 갯가 사람, 나 '삼천포 사람'하고 지은 거죠."
천광영 작가는 1960년 삼천포에서 3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건축과 목공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넉넉하던 가세가 기울고, 생계를 꾸리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 됐다. 누군가 '니 꿈이 뭐니?'하고 물으면 지체 없이 '화가'라고 답하던 소년은 그때부터 꿈을 속으로만 품게 됐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도 동창들은 절 그림 잘 그렸던 애로 기억해요. 성장하면서 형편이나 여건이 안 되도 항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망이 있었어요.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거야'란 맘을 품고 살았죠."
먹고 사는 일을 고민하던 그는 83년 당시 '한전'이던 지금의 남동발전에 입사했다. 스스로 돈을 벌게 되자 곧장 그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직장과 병행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그는 '서예'를 만났다.
"그 당시 삼천포 관내에 그림 배울 데가 드물었어요. 스승을 찾기도 힘들고 서양화나 동양화는 미대를 가야 쳐주는데, 직장인인 제 페이스하고는 안 맞는 거죠. 서예는 나만 열심히 하면 되니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때부터다. 그는 야간대학을 다니듯 낮에는 직장을, 밤에는 서예학원을 다녔다. 꾸준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쪼개 서예에 파고드는 열정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가히 '주경야독'이 아닌가. 오죽하면 91년에 결혼하고 나서도 '아내하고 결혼한 게 아니라 서예하고 결혼했냐'는 소릴 들었다며 천 작가가 웃었다.
"사실 문인화를 시작하게 된 데에는 아내의 영향도 있죠. 서로 사랑하려면 마주보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을 봐야 행복하다는데, 저희는 '문인화'라는 같은 방향을 보니까 행운이죠."
그의 아내는 문인화 작가로 활동하는 정숙재(58) 씨다. 지금 부부는 함께 서예‧문인화실을 운영하고 있다. 낮에는 정 씨가 화실을 보고, 저녁에는 천 씨가 직장에서 퇴근해 화실을 운영한다.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걷는 이가 있어서일까, '행복'이란 그들에게 멀리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마침 동명의 작품이 있어 천 작가가 소개했다.
"이 '행복(幸福)'이란 작품이 인기가 많은데, 작품을 자세히 보면 '행'자는 소나무가 한그루 자라난 느낌이고, '복'자는 기름진 땅처럼 보이게 했어요. 땅이 부유하고 기름져야 나무도 잘 서겠죠. 음양의 조화를 담아냈어요."
천 작가의 작품들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의 작품들은 '읽는 글씨'에서 끝나지 않고 '보는 글씨'의 재미까지 더해냈다. 한 작품 한 작품 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깊은 통찰과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