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는 1911년 105인 사건후 1915년 2월 13일에 출감하여 변절한 후 적극적 친일에 앞장서 일제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는 대표적 친일파였다.윤치호는 1911년 105인 사건후 1915년 2월 13일에 출감하여 변절한 후 적극적 친일에 앞장서 일제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는 대표적 친일파였다.
서재필의 신문 창간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한 것은 일본 공사관이었다. 일본은 서울에서 『한성신보』를 발행하면서 한국내의 반일감정을 무마시키고 친일세력을 비호하면서 여론을 독점하다시피하고 있었다. 서재필에 의해 신문이 창간되면 반일적인 논지가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창간작업을 방해하였다.
갑신정변 때의 동지로서 미국 망명 후 귀국하여 총리대신 비서관을 거쳐 1895년 학부협판이었던 윤치호의 일기에 일본의 방해공작 사실이 소상하게 담겨 있다.
서재필이 만나자고 하여 오후 4시에 그를 방문하였다. 그는 "일본인들이 가만두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조선은 2개의 신문이 유지될 정도로 발전되지 못했고 그들의 『한성신보』는 계속 간행되어야 하므로 경쟁지를 만들려는 어떠한 시도도 분쇄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호의에 반하는 일을 하는 자는 누구든 죽이겠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였다. 언젠가 내가 조선의 몇몇 기술자들을 상대로 석유를 미국으로부터 직수입하면 가격이 싸서 소비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그들은 나를 대단히 싫어한다. 여기에는 나 혼자이다. 미국 정부는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조선 정부나 국민은 일본인의 암살로부터 나를 보호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 나는 혼자이고 보호도 받지 못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주석 3)
일본의 치열한 방해공작에도 서재필이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세력이 득세하고 일본세력이 추락하는 정세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일본측의 방해를 극복하면서 신문 창간을 서둘렀다. 정부는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의 건물을 신문사 사옥으로 쓰도록 하고, 신문창간 비용으로 3,000원, 서재필 주거 구매비로 1,400원을 지원하였다. 서재필은 귀국 직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10년간 월 300원의 급여를 받기로 정부와 계약을 하였다. 미국에서 월 100달러(원화와 동일) 수준에서 크게 많아진 급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