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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의 약속... 다음 생은 도자기로 태어날 거야"

[페루의 도예가들 ②] 페루 오얀타이탐보에서 만난 도예가 루초 솔레르

등록 2020.03.14 11:48수정 2020.03.15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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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8일부터 2월 25일까지 페루 도자기 여행을 다녀왔다. 2월 첫 주 페루의 쿠스코주, 피삭에서 열린 제1회 라틴도예가들의 축제 '잉카 길의 흙(Barro del Qhapaq Nan)' 참여를 시작으로 그곳에서 인연이 된 도예가들과 남미 지인들의 소개를 통해 연이 닿은 '흙'을 재료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여정은 짧게나마 '잉카의 길'을 걸어보는 시간과 같았다. 그 만남의 이야기를 담았다.

*Qhapaq Nan이란, 페루 원주민 언어 케추아어로 '잉카의 길'을 뜻한다. 'qhapaq'는 '부'를 의미하고 'nan'은 길을 의미하여 '부의 길'로 해석되기도 한다. 잉카 제국시절 새로이 만들어진 길이 아닌 이미 존재했던 길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4만 킬로미터가 넘는 길로 알려져 있다. [기자말]
 마추픽추로 가는 길목마을, 오얀타이탐보
마추픽추로 가는 길목마을, 오얀타이탐보신주희
 
페루 오얀타이탐보는 마추픽추를 가는 길목의 마을이다. 여행자들은 주로 쿠스코에 진지를 두고 마추픽추를 향하지만 기차가 오얀타이탐보역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꼭 들러야 하는 마을이다.

성계투어로 알려진 '성스러운 계곡 투어'에도 이 지역은 빠지지 않는다. 돌로 된 잉카 마을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고 주변에 관광지로 개발되거나 그렇지 않은 유적만 200여 곳이 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그저 지나가는 혹은 머무는 여행자들이 이 작은 마을에 넘친다. 나 역시 마추픽추를 가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으나, 예정보다 일정을 조금 늘린 것에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도예 축제에서 만난 도예가 루초 솔레르 (Lucho Soler, 이하 루초)의 작업실이 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K-POP을 사랑하는 도예가의 딸
  
 도예가 루초 솔레르
도예가 루초 솔레르신주희



페루 피삭의 메인 광장에 펼쳐진 도예가들의 오픈 부스에서 '루초 솔레르' 이름표를 보고 반가웠던 것은 축제에 오기 전에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어서였다. 페루 도자기 여행을 갈 거라고, 혹 추천해줄 만한 도예가가 있는지 묻는 SNS의 내 글에 칠레 도예가 친구가 댓글로 그의 이름을 알려준 것이다.
   
괜히 혼자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를 하니 "내 딸을 만나야 해"라며 어딘가 있을 딸부터 찾았다. 방학이라 아빠와 함께 축제에 참여한 루초의 중학생 딸은 요즘 한국 K-POP에 푹 빠져있었다. 혼자 한국어를 독학하며 한국 방문의 꿈을 꾸는 중이었다. 오히려 아빠에게 한국 도자기가 훌륭하다며 한국 도자기도 볼 겸 자기와 함께 여행을 가자고 바람을 넣고 있다고도 했다.

딸의 성화에 루초도 한국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상태였으니 한국에서 문득 나타난 방문자가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루초보다는 딸이 더 신이 났다. 몇 마디 혼자 배운 한국어가 오가며, 그렇게 첫 만남은 도예가와의 만남이기보다는 한류를 사랑하는 페루 청소년과의 만남으로 마무리되었고 행사 후 루초의 작업실이 있는 오얀타이탐보에서의 재회를 약속했다.
    
과거가 부른 운명
 
 한국방문을 꿈꾸는 루초와 딸.
한국방문을 꿈꾸는 루초와 딸. 신주희
 
재회를 약속 한 날은 오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좀 서둘러 만나기로 한 마을 광장이 잘 보이는 2층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하며 광장을 살피다 보니 어느 골목에선가 나온 도예가 루초가 광장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자리에서 다시 만나니 행사장에서 만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오얀타이탐보의 이쁜 골목길 중 어느 작은 곳에 있는 루초의 작업실은 거창하지 않았다. 작업을 위한 책상과 손물레, 연필꽂이에 가지런히 꽂힌 손작업을 위한 다양한 도구들이 정갈하게 놓여있었고, 작업실 한 벽면으로 하나하나가 다 다른 모습을 하는 그의 작품들이 놓여있었다. 한마디로 군더더기가 없었다.
 
 루초의 도자기를 빚는 도구들
루초의 도자기를 빚는 도구들신주희
 
"나에게 흙은 운명과 같아"
  

그는 나에게 어렸을 때 겪은 일을 설명했다. 어린 시절 우연히 페루 중부 원주민 마을에 갔다가 옛 무덤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다. 다소 판타지적인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그 무덤을 파려고 했는데 강한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막았는데, 그 바람 속에서 환상처럼 과거 그 자리에서 흙으로 그릇을 빚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전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어린 그에게 강하게 남은 기억이었던 것 같다. 결국 50년의 도예 인생의 시작이었으니 말이다.

루초는 어린 시절 그 이미지를 오랫동안 지울 수 없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며 북미 원주민의 도자기를 배우고, 이후 멕시코 원주민 마을의 한 도예가의 집에 머물며 그곳의 전통도자기를 배웠다. 그렇게 도자기와의 삶은 이어졌다.

손에서 손으로 마무리되는 도자기


그의 도자기는 특별하다. 유약을 입히지 않은 낮은 온도로 구워낸 도자기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광이 나고 섬세하다. 손으로 형태를 만들고 판으로 쳐서 모양을 잡고, 흙 안료를 입히고 돌로 연마를 한다. 거의 3일에서 5일 동안 연마를 거듭하면 도자기의 표면은 마치 유약을 바른 듯 반짝인다. 그사이 고대 도자기의 모티브가 들어간 문양들과 디자인들이 덧입혀져 멋을 더한다. 최근에서 금으로 장식을 하는 본인만의 방법도 발견했다.
 
 연마와 저온으로 구워낸 루초의 도자기
연마와 저온으로 구워낸 루초의 도자기신주희
   
 작업실에 진열된 루초의 도자기들
작업실에 진열된 루초의 도자기들신주희
 
도자기 소성 역시 그만의 방법이 있다. 직접 작업을 보지 못했지만 사진을 보며 설명을 들으니 노천 소성(야외에서 오픈 불로 굽는 방식)이다. 나무를 쌓고 그 안에 도자기를 양철통에 넣어 구워내는데 800도가 안 되는 온도로 짧은 시간에 소성한다고 한다. 조금만 온도가 맞지 않아도 애써 연마한 윤기가 사라지니 그것이 그만의 작업 비밀이자 노하우인 셈이다.

"내 손을 안 거치는 과정이 없지. 한 번에 하나씩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고, 매번 다른 형태와 무늬를 상상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언제나 같아."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반복 작업이 아닌,  반복의 시간을 통해 점점 깊은 간결함을 갖게 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루초의 도자기는 말하고 있었다.
 
다음 생은 도자기로 태어나는 꿈


도예가 루초는 요즘 다음 정착지에 대한 고민 중이다. 오랫동안 미국과 멕시코에서 도자기를 배우고, 20여 년 페루에서 그의 작업을 하고 있지만 국내에서 도자기에 대한 인식이나 본인의 도자기에 대한 제대로 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는 것이 답답한 탓이다. 딸에 대한 고민도 있다. 딸에게 조금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는 아빠의 마음 말이다. 지금 딸의 바람을 생각한다면 한국에 가야겠지만 루초에게 한국은 여전히 멀고 낯선 곳이니 아마도 절충안을 찾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다음 목적지가 어디가 될지 여전히 탐색 중이라 했다.

"나는 죽으면 화장해서 그 재를 흙에 섞어 도자기로 만들어 달라고 할 거야. 내 딸이 그걸 해주기로 했어. 그렇게 만들어진 도자기가 깨지면 다시 그 조각들을 흙에 섞어 다른 도자기로 만드는 거지. 그렇게 순환되며 도자기로 살아간 이후의 생이라면 도예가로서 최고가 아닐까."  
 
 도자기로 빚어지는 꿈을 꾸는 루초 솔레르
도자기로 빚어지는 꿈을 꾸는 루초 솔레르신주희
    
과거의 꿈같았던 장면으로 시작하여, 현재의 삶이 이어지고 다시 도자기로 환생하는 미래의 판타지를 꿈꾸는 도예가, 그 꿈이 퍽 낭만적이어서 나 역시 잠시 그런 미래를 꿈꾸어 보게 되었다. 과연 누가 나를 도자기로 빚어줄까. 그렇게 빚어진 나는 어떤 모습의 도자기일까. 그 도자기는 어떻게 변해갈까.

한 도예가의 도자기가 되는 꿈이 나에게까지 전염되어 오랜만에 깊은 설렘을 가졌던 만남이었다.
#페루도예가들 #오얀타이탐보 #페루여행 #페루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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