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가결 후에도 꺼지지 않은 '촛불의 바다'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다음 날인 2016년 12월 10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정권 끝장내는 날'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즉각퇴진'을 외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촛불, 나,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나는 2016년 겨울을 수놓았던 촛불 아래,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와 정치학도로서 부딪힌 진로의 문제가 맞물려 이듬해였던 2017년 2월에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여 대학생위원회에서 활동한 당원이었다. 나의 입당 직후인 2017년 3월 10일에는 헌법재판소가 역사적 결정을 내림에 따라 사상 초유의 5월 조기 대선이 실시되었다. 나는 자연스레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 유세에 대학생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게 되었고, 선거 당일에는 당원 동지들과 함께 나의 집에서 개표방송을 보면서 벅찬 감동과 희열을 느꼈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관계의 개선에 뚜렷한 성과를 거두는 과정을 보면서 더불어민주당의 당원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비록 많은 역할을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페이스북 등 SNS에 게시하는 카드뉴스를 만드는 일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고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유세에도 참여하였다. 나는 2019년에 불거진 이른바 조국 사태와 청와대 선거 개입 의혹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추진한 공수처 설치와 같은 여러 개혁 입법에 지지를 보냈다. 특히 나는 국민의 대리기구인 국회에 민의(民意)의 정확한 반영을 가능하게 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의를 왜곡했던 국회
그동안 국회에서 국민의 뜻이 제대로 반영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이는 매년 시행되었던 국가사회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국회가 최하위 신세를 면치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2019년의 조사에서 국회는 전체 응답자 중 2.4%의 선택만을 받았다). 오히려 국회는 주권자의 뜻을 받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것을 왜곡해 특정 정파에 유리하게 해석하여 왔다.
국회가 주권자의 뜻을 심각하게 훼손한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아마도 1954년의 '사사오입개헌'일 것이다. 이승만과 자유당 일당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없애도록 하는 개헌을 시도했지만, 국회의원들의 무기명 투표 결과는 재적의원 203명(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개헌에 필요한 의결정족수(재적의원의 2/3 이상)인 135.333명에 0.33명이 모자란 것이었기 때문에 개헌안은 부결되었다.
하지만 자유당은 수학의 '사사오입론'을 근거로 내세우며 이 위헌적 개헌을 성사시켰고, 이것은 자유당 내의 양심적인 소장파 의원들이 연쇄적으로 탈당하는 결과와 함께 야당 측 세력들이 대여투쟁을 위한 호헌동지회라는 단일 원내 교섭단체를 결성하는 사건을 초래하였다. 이것은 이듬해 통합야당의 출범으로 이어졌고, 이때 탄생한 '민주당'이 바로 지금의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지는 민주당계 정당의 첫 출발이었다. 민의를 왜곡했던 자유당은 1956년 대선에서 승리해 자신들의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지만, 4.19 혁명으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2004년에 일어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또한 국회가 민의를 왜곡했던 대표적인 사건이다. 같은 해 3월 12일에 야당 국회의원 193명의 찬성으로 가결된 대통령 탄핵안은 비록 노무현 대통령 특유의 공격적인 발언으로 촉발된 점이 있으나 이는 국민 대다수의 뜻과 대조되는 결정이었다.
국민들은 탄핵안 통과 이후 불과 한 달여 만에 실시되었던 제17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줌으로써, 국회가 국민의 대리자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경우에 어떠한 처분을 받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이 선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유권자들의 선택의 폭이 과거보다 넓어졌다는 것이다. 17대 총선의 결과를 살펴보면, 열린우리당이 152석, 한나라당은 121석, 민주노동당이 10석, 새천년민주당은 9석, 자유민주연합은 4석을 차지하였다(이외에 국민통합21이 1석, 무소속이 2석을 획득).
17대 총선에서는 헌정 사상 최초로 1인 2표제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지역구 후보에 주는 1표와 별도로 정당에도 1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두 거대 양당만이 아닌 다른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실제로 범진보계를 선호하는 유권자들이 지역구는 열린우리당에 투표하면서도 비례대표는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양상을 띠게 만들었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사상 최초로 원내에 진출하는 성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선거제 개혁은 비록 거대 양당의 독점이라는 한국정치의 고질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했지만, 유권자들의 다양한 성향이 선거에 반영되도록 하였다.
과연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2019년 12월에 이루어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또한 다양한 정파의 이익이 절충된 결과로 탄생한 제도이긴 했지만, 나는 이번 선거제도의 변화가 거대 양당 중심의 국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민주당에 당적을 두었지만, 나는 이번 선거제 개혁으로 인하여 정의당과 같은 기존의 원내 진보정당뿐 아니라 녹색당 등 다른 기타 원외정당의 목소리가 이제는 국회에 울려 퍼질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며 한국 사회가 보다 진보적이고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는 공동체로 발전해 나갈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의 전신)이 꼼수를 통해 '미래한국당'이라는 반개혁적 위성정당을 내세움으로써 새로운 선거제도를 무력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더욱 놀라웠던 것은 더불어민주당이 이들과 동일한 선택지, 즉 명분이 없고 실리마저 확실하지 않은 비례연합정당에의 참여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사실이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대표적인 저서 <군주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라는 구절로 회자되고는 한다. 민주당의 비례연합정당 참여에 동의한 많은 당원들에게는 이러한 논리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의 전제는 그 '목적' 자체가 정당해야 하며, 지도자(군주)가 옳은 수단을 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방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주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동료 시민을 죽이고, 친구를 배신하고, 신의가 없이 처신하고, 무자비하고, 반종교적인 것을 덕(virtú)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영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군주론>, 까치, 제3판 개역본, p. 62)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선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의 몰락은 불가피합니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중략...) 게다가 인간의 상황이란 그러한 성품들을 전적으로 발휘하는 미덕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신중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권력기반을 파괴할 정도의 악덕으로 인해서 악명을 떨치는 것을 피하고, 또 정치적으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악덕일지라도 가급적 피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같은 책, pp. 106~107)
그렇다면 작금의 상황은 더불어민주당에게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울 것을 요구하는가? 민주당이 비례연합정당에의 참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다가오는 21대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원내 제1당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문재인 정부에 강력한 국정 동력을 제공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총선에서 승리한다'라는 목적의 정당성 여부는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판단하는 것이지 결코 특정 정파 세력이 정의할 수는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자신들의 승리가 정말로 5천만 시민들 모두에게 정당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목적이라고 믿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오만함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제 3년간 몸담았던 더불어민주당을 떠난다. 반칙과 꼼수를 또 다른 반칙과 꼼수로 막아보겠다는 발상은 민주당에게 권력을 가져다 줄지언정 민주열사들의 피와 땀이 가져다주었던 민주주의의 영광을 누리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는 진보개혁세력을 배신하고, 자신들이 공언했던 선거제 개혁을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5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