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집엄마가 지금 나보다 어릴때
윤솔지
1983년 여름이었다. 엄마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용인에서도 가장 구석진 농촌 황새울로 이사를 했다. 가진 돈은 전세금을 뺀 8백만 원이 전부였다. 엄마는 터를 사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집을 지었다. 엄마는 생애 처음으로 가져보는 집이라 치장에 대한 욕심이 원대했다. 유기농 작물을 재배하는 것은 당연한 계획이라 해도 집안 치장에 부르주아적 흉내를 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코미디다.
별로 크지도 않은 거실에 벽난로를 설치한 적이 있는데 당시 불기가 거실로 나와 자칫하면 불이 날 뻔했다. 심지어 빠져나가야 할 연기가 집안에 고이면서 온 식구가 콜록거려야 했다. 욕실 타일은 서울로 다니며 직접 골라 깔았는데 어느 날 욕실 구멍으로 뱀이 올라와 턱 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전교생이 100여 명 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봄이 되면 아이들과 칡을 캤다. 우리 힘으로 캐낼 수 있는 칡은 가느다란 것뿐이었지만 그것도 맛나다고 온종일 씹고 다녔다. 진달래꽃은 입이 퍼레지도록 따먹었고, 아카시아꽃은 꼭지를 떼 꿀을 빨아 먹었다. 한번은 나무에 올라가 꽃을 따다가 벌에 쏘일 뻔도 했다. 냉이와 쑥도 캐왔지만, 엄마는 개똥밭에서 캐온 것이라며 거름더미에 갖다 버렸다.
엄마는 유기농을 먹겠다며 텃밭에 일용할 식물 대부분을 심었다. 그러나 엄마의 원대한 꿈과 달리 딸기는 시어서 먹을 수가 없었고 수박과 참외는 조막만 했으며 그나마 잘 익지 않아 텁텁했다. 고추 마늘 등에 약을 주지 않아 첫해는 거의 건진 게 없었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반찬은 뻣뻣했고 조미료를 넣지 않아 맛이 없었다. 나는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밥을 얻어먹었다. 그 사실도 모르는 엄마는 식욕을 돋운다며 나에게 '원기소'(당시 영양제 이름)를 사다 먹였다.
손님을 피해서 왔는데 손님이 더 많아졌다
엄마는 시골에서 창작열을 불태웠다. <아들>, <밤길>, <님>, <고삐>, <들> 등이 황새울에서 생산되었다. 작품이 주목을 받으면서 우리 집에는 기자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등장하면서부터는 인근 청년, 농민들까지 쉴 새 없이 방문했다.
당시는 언론이 마비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밤길>을 읽은 사람들은 엄마로부터 광주항쟁에 대한 진실을 듣고 싶어 했고, 팀스피릿(한반도에서의 군사 돌발사태 발발에 대비해 연례적으로 실시됐던 한·미 합동군사훈련)으로 농토를 망친 농민들은 미군들의 부당성을 알고자 했다. 하다못해 스님들까지 찾아와 시국을 논했다. 마구잡이로 찾아오는 손님도 있었다. 연재가 걸렸거나 속히 끝내야 할 원고가 있을 때 손님이 오면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창비에 <들>을 연재할 때였다. 경기도 안성에서 사회운동을 한다는 남자 둘이 찾아왔다. 그때 엄마는 아빠에게 돌려보내라고 이르고 책고에 숨었다. 마음 착한 아빠는 손님을 돌려보내지 않고 책고 근처 방으로 맞아들였다. 문 하나 사이를 두고 숨은 엄마는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그때 그만 기침이 터져 나왔는지 콜록거렸다. 당황했을 법도 한데 손님들은 엄마의 마음을 눈치 채고 떠나 주었다.
엄마는 복 받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