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 등을 협박해 성 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유포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조주빈씨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3월, N번방과 박사방은 한국 여성들의 분노를 터뜨린 뇌관이었다. 1년간 수많은 남성이 텔레그램에서 돈을 지불하고 은밀하게 '성착취'를 관전했다. 보안성이 높은 텔레그램은 이들의 추악한 욕구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성년자 16명을 포함한 여성 74명의 삶이 유린당했다.
23일 SBS 8시 뉴스가 공개한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25)씨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한 대학의 학보사에서 편집국장까지 맡았던 조씨는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을 법한 20대 남성이었다. 그 누구도 조씨가 조직적인 성착취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악이란 결코 뿔 달린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도, 특별한 형상을 띠고 있지도 않다.
최근 많은 친구의 소셜 네트워크 피드를 점거한 것이 'N번방'과 '박사방'이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지인들을 태그하면서 릴레이를 이어가는 이들도 볼 수 있었다. N번방과 박사방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 및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 5건은 500만 명을 돌파했다. 이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N번방 회원 전원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무엇이 시민들을 이렇게 움직였을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느끼는 죄의식과 부채 의식이 그 기저에 있었을 것이다. N번방과 박사방처럼 여성을 착취하는 강간 문화(Rape Culture)는 예전부터 존재해왔다. (학술적 관점에서 '강간 문화'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인 공격성, 그리고 폭력성을 장려하는 신념의 복잡한 집합체'로 규정된다.) 강간 문화는 가까운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군에 복무하던 시절, 불법 성매매 경험을 자랑하는 이들을 두고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하지 못했던 죄의식이 나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직장에서 발생하는 성희롱, '국산 야동'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는 불법 촬영 동영상, 미투 운동이 밝혀낸 성범죄, 버닝썬 사태에 이르기까지 '강간 문화'는 상황과 시대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해 왔다. 그러나 사회적 공분에 비해 합당한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서지현 검사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N번방과 박사방, 박사와 갓갓은 예견된 범죄였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26만 명이라는 숫자는 중복 합계에 불과하다!'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하는 남성들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내 옆을 지나가는 남성 중 누가 성착취에 가담했을지 믿을 수 없다'며 공포를 고백하는 여성들도 있다. 자신이 이미 '지인 능욕'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는 친구도 있었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해 분노의 목소리를 내는 남성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실존하는 공포 앞에서 '나는 아닌데' 따위의 말은 무용하기 짝이 없다. 여성이 직면하는 공포는 '억울함' 정도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의 공포를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00여 개에 이르는 방 회원 수를 단순 합산했을 경우 그 합계가 26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복의 경우를 언급하면서 '실제 인원은 26만 명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OTT 서비스처럼 텔레그램 계정을 나누어 이용했을 경우를 고려하면, 우리는 정확한 가담자의 숫자를 아직 알 수 없다. 3만 명일 수도 있고, 10만 명일 수도 있고, 26만 명을 상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숫자가 줄어든다고 해서 실질적 공포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 공포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필 필요가 있다.
"Cuz my friends are still 아직도 Be killed, stalked, abused"
- 제이 클레프의 'mama, see' 중
최근 한국 흑인음악계에서 큰 주목을 받는 가수 제이 클레프는 'mama, see'(2019)라는 곡을 통해 여성으로서 느끼는 지점들을 다뤘다. 그는 "내 친구들은 여전히 죽임당하고, 스토킹 당하고, 학대당하고 있다"고 노래했다. 그리고 젠더 폭력에 대한 뉴스들을 두고 "우리네 차례가 아니었을 뿐인 소식들"이라고 말한다. 이 가사처럼, 여성들은 이 사건을 피부로 와닿게 느끼고 있다. 텔레그램에서 벌어진 비극이 생존과 공포의 문제라고 외치고 있다.
괴로워도 목소리 내야 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