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네그리(왼쪽)와 마이클 하트가 신작 <어셈블리>를 미국에서 출판할 당시 사진(2017)
알렙 출판사 사진 제공
인민주권은 거부되어야 할까?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 대한 저자들의 거부는 주권 개념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 네그리와 하트는 '집중된 인민의 의지'라는 루소주의적 표상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면서, "주권이 좌파의 힘을 복원하는 처방이라는 믿음"을 강력히 비판한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국가의 주권 논리가 갖는 문제를 비판하는 것과, 주권 개념 자체를 (심지어 전략적 차원에서도) 근본적으로 거부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다른 선택지라는 점이다. 예컨대 네그리와 하트가 예찬하는 2015년 그리스 국민투표는 바로 그러한 '일반의지'로서의 인민주권의 표현이 아닌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30년간의 총공세 이후, '잃어버린' 주권에 대한 요구들이 우익 포퓰리즘의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 저자들은 한 챕터를 활용해서 새로운 우익 운동의 대두라는 현상을 분석하는데, 여기서 그들은 우익 포퓰리즘이라는 현상에 대한 자신들의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한다. 나아가 저자들이 보기에 주권을 강조하는 논리는 곧 우익 포퓰리즘과 동일시 된다.
그렇다면 저자들의 주장대로 '주권은 억압적이므로 거부해야 한다'라는 (또 다른 규범주의적, 당위적) 요청으로 이에 맞서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국가주권'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인민주권' 개념에 남아 있는 여전히 전복적인 요소들을 복권하는 전략을 택해야 할 것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여전히 후자의 전략이 유효하며, 그것이 저항정치의 전복적 요소를 긍정하면서도 마키아벨리적인 의미에서 현실주의적으로 사고하는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민주적 사회주의'나 '좌파 포퓰리즘'과 같은,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내부에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려는 기획을 비판할 때에는 과도하게 비관적이다.
그들의 진단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지배 하에서 전통적인 노조들과 노동계급 조직들은 완전히 망가졌고 조합주의적으로 되었으며 사회적 헌법질서나 복지구조도 알맹이가 다 빠져나갔"(<어셈블리>, 106쪽)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 다양한 사유들은 실현 불가능하다.
'기술진보를 통한 사회적 협력의 달성'은 가능할까?
반면 저자들은 그들이 수립하고자 하는 대안적 제도형태와 이를 향해 나아가는 발전 과정에 관해 묘사할 때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이 낙관주의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저자들이 갖는 기술발전 낙관주의와 경제환원주의에서 비롯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자본주의 경제의 변화 과정이 직접적으로 새로운 제도적 차원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비물질적 노동, 비물질적 소유 형태의 확산과 그 사회적 성격의 전면화는 네트워크 형태의 비소유적 관계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깔려 있다.
여기에는 물론 타당한 측면이 존재한다. 특히 현재의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이윤이 생산되고 자본에 전유되는 특수한 메커니즘 속에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수탈적 사유재산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 지적은 매우 큰 현실성을 갖는다.
플랫폼 자본주의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삶과 노동행위를 통해 창조된 정보들과 이를 이용한 이익을 소수의 자본에게 귀속시킨다. 아마존, 페이스북, 구글, 우버 등은 알고리즘을 개발했다는 이유로 여타의 사회 구성원들의 활동을 통해 생산되는 다양한 경제적 부를 전유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알고리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협동적 지성에서 나온 기계이자 '일반지성'의 생산물인 고정자본이다."(『어셈블리』, 220쪽) 이러한 지적은 사회적 공공성과 공유에 기반을 둔 정의로운 경제체제의 형성을 위한 상상의 현실적 토대를 제공한다.
따라서 발상을 뒤집어보면,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사회적 협력과 공통적인 것에 기반한 경제체제의 실현을 가능하게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적 생산 형태들이 전면화 되면 코뮨적 관계로의 이행은 불가피한 것이 될 것이며, 자율적 사회운동은 ('권력장악' 없이도) 그러한 추세를 가속화함으로써 자본과 국가의 반동적 대응을 막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진보를 통한 사회적 협력의 달성'이라는 저자들의 구상 속에서 기술의 발전은 사회변화와 사실상 동일시된다.
이는 19세기 후반 이래 과학혁명 이후 생산력의 증대와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유토피아를 낳을 것이라는 당대 노동운동가들의 '환등상(판타스마고리아)'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어셈블리>에서 이 비난을 피하기 위해 벤야민의 바로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기도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벤야민의 언급은 두 저자들에게도 해당하는 것 같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기계적 배치에 흡수되는 청년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들의 바로 그 존재가 저항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이 알든 모르든 그들은 저항 안에서 생산한다."(<어셈블리>, 228쪽) 이러한 저자들의 '저항의 존재론'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고통의 존재론'이다. 감히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저자들은 신자유주의화된 자본주의적 삶과 끝없는 잉여화의 위협이 낳는 고통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것 같다.
저자들의 서술 속에서 오늘날 불안정 청년노동자의 위기는 '새로운 다중의 출현'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은 끝없는 '노마드적 삶'으로 미화된다. 심지어 저자들은 칼레와 레스보스 등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는 난민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의 고통을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곧바로 이렇게 말한다.
"이주민들의 고통은 현실이고 그들의 상황은 종종 비극적이며, 또 수많은 통제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이들 이주민들은 자유롭고 유동하는 주체들이다."(<어셈블리>, 368쪽)
저자들은 난민과 이주민들이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과 곤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탈주의 주체'로 예찬될 뿐이다. 이것은 지난 20년간 네그리와 하트의 저작들에 나타난 공통적 태도이며, 여기에서 '기쁨과 긍정'의 존재론은 오늘날 '존재의 비극'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강조하듯, 실체화된 긍정성은 실체화된 부정성만큼이나 허무적이다. '저항의 존재론'은 전복적 자세를 강조하지만, 사실상 현재의 발전과정을 무비판적으로 긍정하는 '옹호론적(apologetic)' 태도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러한 사유는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시류를 거슬러 솔질하는' 방향의 사유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한 사유는 사회적인 것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적 심급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한 사유는 '부정적인 것에 머물기'를 실천하지 못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전개한 저항의 낙관주의는 숭고한 저항 정신의 표현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이러한 난점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어셈블리 -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제언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지은이), 이승준, 정유진 (옮긴이),
알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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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존재론, 그 위대하고 위태로운 낙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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