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자료사진)
권우성
지금의 20대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고속성장이란 열매는 '경쟁'이란 원죄를 품고 있었다. 그저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을 뿐이다. 안정된 직장은 행복의 필요조건이었다.
한창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가야 할 시기에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애인을 만날 수 있다"라는 우스갯소리로 사랑보다 성적을 우선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우정의 가치를 배워야 할 학교에서는 친구이자 동시에 경쟁자라는 모순 속에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청춘의 핏물이 쌀뜨물"(최현우,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이 되도록 우리는 경쟁을 몸에 새기고 있었다. 아무도 행복을 향한 경쟁이라는 길이 누군가의 불행을 대가로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적대가 아닌 연대의 문제다
비단 20대뿐일까. 현재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둘러싼 공정이란 담론은 사실 (공정)경쟁에 대한 담론이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언론에서 이를 공정 경쟁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래서 많은 20대 청춘들은 자신이 행복의 길이라 생각했던 곳으로 갑작스레 들어온 이들로 인해 불행을 느꼈다. 그리고 이를 불공정으로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경쟁이란 의미에서 이는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번 문제는 논쟁의 전선이 잘못됐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공정이 아닌 인정의 문제이고, 경쟁이 아닌 공생의 문제이며, 적대가 아닌 연대의 문제다.
일차적으로 우리 사회 안전을 담당하는 이들의 노동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많은 산업 현장과 공공단체에서 안전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 비정규직이란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안전을 담당하지만 삶은 불안정하다는 아이러니에서 삶을 안정되게 만드는 것은 공정을 해치는 것이 아닌 그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실패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나 많은 유형의 비정규직을 양산한 우리 사회가 실패한 것이다. 삶은 경주가 아님에도 한 공간 속에 일하면서 1등과 2등을 가르듯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고, 본사와 자회사 직원을 나누는 것은 정상일 수 없다.
경쟁이 인생의 유일한 규칙일 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잊게 된다. "적어도 남들만큼 살자"는 바람은 소박하지만, 그것이 결코 "저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구별로 가서는 안 되며, 더 나아가 "저들은 우리와 동일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돼"로 이어지는 것은 너무나 비극적인 풍경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음에도 다른 시민들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우고 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번 코로나19를 함께 겪으며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사울 알린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 중 일부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렇듯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고 지켜온 것은 항상 적대가 아닌 연대였다.
이번 논쟁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한 가지 대원칙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비정규직 철폐다. 그 누구도 불안정한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는 이번 정규직화를 반대하던 이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정과 공생과 연대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번 논쟁은 결코 정파적 입장에 따라 끝나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수많은 비정규직이 존재한다. 그 일자리가 상시지속업무임에도, 동일한 업무를 하는 정규직이 있음에도 비정규직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번 논의가 우리 사회의 전반에서 비정규직 철폐라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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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글이 누군가에겐 낯설게 느껴졌으면 합니다. 익숙함은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세상을 낯설게 바라볼 때 비로소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디서나 이방인이 되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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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정규직화 논란, 싸움의 전선이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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