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 젠슨 지음 '문명과 혐오' 겉표지
아고라
아이들의 행동을 교정해서라도 그런 일을 막고 싶다고는 하지만, 그런 태도 속엔 주류 백인 사회의 시선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런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피해 흑인의 행동 거지를 비난하는, '그러게 왜 의심할 만한 행동을 하냐'는 공격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가해 경찰의 행위가 욕을 먹더라도 '질 나쁜 경찰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데릭 젠슨은 책 <문명과 혐오>에서 고대의 노예제, 미국 역사 초창기의 원주민 학살, 나치의 유대인 학살,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적 착취, 인종 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범죄,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가 가담하고 있는 무자비한 환경파괴에 이르는 일련의 폭력을 모두 '문명과 함께 시작된 제도적인 혐오와 착취'의 일환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러한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며 잔혹하기 짝이 없는 착취와 살육의 장면들을 낱낱이 펼쳐 보인다. 집단 린치를 당하고 불에 타 죽은 임신 8개월의 흑인 여성, 벌거벗은 채 구덩이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총살 당한 유태인들, 가학적이고 엽기적인 포르노물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웹사이트를 묘사하는 대목들은 욕지기를 불러왔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분명 타인을 저런 식으로 짓밟고 학살하는 비인간적인 파렴치한들과 다른데, 그런 나를 끌어다 '다시 똑바로 보라'고 말하는 그가 잔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저자가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보고 듣는 인종차별이나 혐오 범죄가 결코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숲의 나무를 베어내고 강물을 오염시키고 원주민들을 그들 땅에서 쫓아내고 제노사이드를 저지르고 노동자들을 착취할 때, 대부분 의식적인 혐오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을 혐오심이라고 스스로 인식하고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문화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대가로 이익—권력, 물질적인 소유물, 위세—을 얻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고 심지어 그걸 부추긴다."
폭력의 문제를 나의 것으로 마주하기
데릭 젠슨은 한 친구의 말을 들려준다.
"만약 어떤 남자가 여자친구를 때린다면, 그 남자의 친구들이 농구 할 때 그를 끼워주지 않아야 하고 그 이유를 그에게 알려주어야 해요. 다른 남자들이 나서서 그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성숙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남자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켜야 해요. 그리고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매번 그렇게 해야 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같은 계층에 속하는 구성원들이 자기 계층에 의해 저질러지는 폭력에 책임을 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타인에 대한 폭력은 비뚤어진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묵인하고 용인하는 우리'의 문제이며, '타자를 인식하는 방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사람들 사이에 이런 문제의식이 많이 공유되기 시작한 건 다행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폭력의 피해자를 향한 연대, 침묵해 온 사람으로서의 부채의식과 반성은 대부분 폭력의 피해자와 같은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같은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아직 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그들을 향해 비난하기는 쉽지만, 나는 과연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홀로코스트가 특이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 삶의 방식을 의문시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에게는 죄가 없는지 물음을 던지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 하나하나가 더 큰 홀로코스트, 즉 지구와 그 주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에 대해 착한 독일인이 될 수가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변함없이 점잖은 백인 남자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문명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더 큰 홀로코스트, 즉 지구와 그 주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라는 구절에서 눈길이 한참 머물렀다. 벌써 몇 개월째 코로나 바이러스로 마비된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그동안의 '대량 학살'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구상의 어떤 존재에게는 엄청난 폭력이었을, 지금도 모두 끊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나의 사소한 행위 하나 하나가 사무친다. 한편으로는 이 어마어마한 결과가 나만의 책임은 아니지 않느냐며 회피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과 회피심리로부터 오는 자기혐오를 직시하고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겁한 내가 쩔쩔매는 사이 이미 그 일을 나서서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보내며, 나 역시 한 걸음 더 그 길로 나아가겠다고 약속한다. 인류에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
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은이), 이현정 (옮긴이),
아고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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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활동가로 살고 싶은 사람.
아이의 선천성 희소질환 '클리펠-트레노네이 증후군(KT 증후군)'을 계기로 <아이는 누가 길러요>를 썼다.
한국PROS환자단체 대표,
부천시 공공병원설립 시민추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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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렴치한 사람 아닌데, '다시 똑바로 보라'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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