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에 구미시 옥계동 3·1공원에 세운 장진홍 의사의 동상은 2015년 진미동의 동락공원으로 옮겨 구미과학관 앞에 서 있다.
장호철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현재 구미시 인동동) 옥계동 문림마을 출신으로 1914년 조선 왕실의 근위부대인 조선보병대에 들어가 근무했던 장진홍은 일제 치하 군대의 한계를 깨닫고 3년 후 제대하였다. 일경의 감시가 점점 심해져 광복단 활동도 어려워지자 1918년 만주로 간 장진홍은 연해주 하바롭스크로 건너가 한인 청장년 80여 명을 규합하여 여러 달 동안 군사훈련을 시행하였다.
한국 청년들을 정예화된 독립군으로 양성하여 일제와 무력항전을 전개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 일대에선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이 깊어지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활동이 곤란해져 그는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건 의열투쟁은 그의 실존적 선택이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온 나라에서 펼쳐졌고,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장진홍은 서적 행상으로 가장하여 전국을 돌면서 일제가 자행한 학살, 방화, 고문 등 만행을 조사했다. 1919년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자, 그는 함대에 근무하는 경북 출신 승무원 부사관 김상철에게 조사서를 전달하고 그 내용을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배포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927년 4월, 경북 경산에서 매약 행상(賣藥行商)을 하며 때를 기다리던 장진홍은 광복단의 동지 이내성(1990 애국장)의 소개로 일본인 아나키스트 호리키리 시게사부로(掘切茂三郞)를 만났다. 호리키리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폭탄 전문가였다. 마땅한 투쟁의 방법을 모색하던 장진홍에게 이 만남은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꾼 것이었다.
대한민국 노인동맹단 강우규의 총독 사이토 저격(1919)부터 의열단 단원들의 연이은 의열투쟁이 어떻게 귀결되었는지를 그가 몰랐을 리는 없다. 강우규는 처형되었고, 부산경찰서 투탄(1920)의 박재혁은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단식으로 자결했으며, 김상옥과 나석주는 각각 의거 현장에서 목숨을 끊었다. 성패를 떠나 의열투쟁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갈 수 있음을 알았던 그에게 그것은 실존적 선택이었다.
일제의 관공서, 은행 등 공공기관을 폭파하여 일제에 타격을 가하면서 조선인에게 투쟁 의지를 환기하고자 한 장진홍은 그에게 폭탄을 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다음 달, 호리키리는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도화선을 보여주며 폭약을 함석 관에 넣고 주위에 다수의 철편을 채워야 한다는 등 폭탄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후, 장진홍은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도화선 등 폭탄 재료를 매입했다. 그는 폭탄을 만들어 경찰부, 조선은행, 식산은행, 법원, 형무소, 동양척식회사 대구지점, 지서, 대구 부호의 집 등 9개소를 대상으로 거사할 작정이었다. 직접 제조한 폭탄 2개를 인근 산중 협곡에 가서 시험하여 그 성능과 위력을 확인하는 등 그는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다.
10월 16일, 장진홍은 칠곡군 인동면 자택에서 노구솥과 가래 등을 부수어 파편으로 만들고 다이너마이트, 뇌관, 도화선 등을 사용하여 불을 붙이면 20~30분 뒤 폭발하는 폭탄 6개를 만들었다. 다음 날 자살용 소탄 1개와 거사용 대탄 4개는 지니고 집을 나선 그는 대구로 가서 친지 집에서 묵었다.
이튿날 오전 9시께, 장진홍은 신문지와 삼끈, 폭탄 4개를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덕흥여관으로 갔다. 11시 30분께 그는 신문지로 포장한 4개의 폭탄 꾸러미를 벌꿀 선물이라며 사환 박노선에게 건네어,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부의 순서로 급히 배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20분 후,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배달된 벌꿀 선물 상자가 터졌다. 폭발은 현장의 은행원과 경찰관 등 5명에게 중상을 입혔고 은행의 창문 70여 개가 모두 부서지면서 유리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으며, 은행 주변의 전깃줄이 모두 끊어질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대구 한복판에서 울린 폭발음은 민족의 얼도 깨웠다
대구 시내 중심가에서 대낮에, 그것도 일제가 한국과 대륙경제 수탈을 위하여 세운 중앙은행인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일어난 이 폭발 사건은 대구 시내를 뒤흔들었다. 폭발로 빚어진 혼란과 함께 도시를 깨운 엄청난 굉음은 식민 통치에 길들고 있던 조선인들의 민족적 정체성도 일깨우는 것이었다.
허를 찔린 일경이 비상 근무령을 내리고 범인 체포에 나섰으나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일경은 1928년 1월, 성주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정기(1995 애족장) 외 8명을 붙잡아 고문하여 진범으로 꾸며 기소하였다. 이때 시인 이육사(1990 애국장)를 비롯한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도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사실상 이들은 폭파사건과 무관한 이들이었다.
조선은행 폭파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장진홍은 1928년 안동과 영천에서 다시 거사를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일본 오사카에 사는 동생 의환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1929년 2월, 은신처가 드러나면서 그는 조선에서 급파한 일경에게 전격 체포됐다.
2월 19일 대구에 압송된 장진홍은 일경의 심문을 받으면서 의거 사실을 선선히 인정했다. 그는 "이번 거사는 야만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정의의 폭탄을 던진 것인데 성공하지 못하고 너희들의 손에 붙들린 것이 천추의 유한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