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에스토니아 KGB(정보.첩보기관) 본부 건물, 현재는 에스토니아 내무부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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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러시아 출신 에스토니아인으로 탈린에 거주하고 있었고 발트의 길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발트의 길이 열리는 날짜에 맞추어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 공군비행장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발트의 길이 열리면 폭격기들이 바로 그 위로 아주 낮은 저공비행을 하면서 사람들을 위협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 정도면 행사의 와해뿐 아니라 사람들의 청각에도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지상 몇 미터의 저공비행은 전투기 자체도 사고가 날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사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발트의 길을 방해할 계획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을 것이다.
당시 탈린에 살고 있었다는 그 전직 조종사는 발크 씨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주었으나 안타깝게도 발크 씨는 이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얘기를 상당히 자세하고 논리적으로 기술해주었기 때문에, 그가 한 이야기들은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고 발크 씨는 전했다.
그것 말고도 탱크 진입 가능성, 군사적 도발을 우려할 만한 첩보나 정보 역시 많이 입수됐다. 그래서 인민전선 내부에서는 '발트의 길'이 1968년 '프라하의 봄'이나 1956년 '헝가리 혁명'처럼 비극적으로 진압될 우려가 역시 상당히 커져 있긴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크렘린(러시아 궁)은 그들이 벌이는 '작당 모의'에 놀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휴가 중이었고 에스토니아 KGB는 모스크바에 계속 정보를 전달해 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는 이런 작은 공화국에서 기획하는 행사가 별다른 큰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던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라고, 발크 씨는 고백했다.
발크 씨는 소련의 군사적, 정치적 해이가 그런 극악한 계획이 실행되는 것을 방지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전해주었다. 고르바초프는 군대 예산도 삭감했다. 당시 경제 상황으로는 모든 가게가 물건들이 하나도 없이 텅텅 비었고, 비행기는커녕 자동차를 운전할 휘발유조차 살 수 없었다. 루블화의 가치도 폭락했고 일반 생활 수준이 매주 눈에 띄게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므로 무기 구매조차 불가능했으며 군인 월급도 지급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에스토니아 KGB(비밀경찰 및 첩보조직)는 비교적 극단적인 단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일에 앞장서던 정보 기관이었다. 발트의 길과 관련된 사람들의 도청 등 명목상 감시활동을 하긴 했으나, 이들을 정치범 명목으로 체포하거나 직접적인 방해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