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웅 광복회장이 15일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15일 광복절 기념사가 논란이 되고 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세력이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조선일보가 크게 칭찬했던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인 인사가 전두환이었다. '단군 이래 최고 지도자'라고 평했다. 돌아보면 조선일보가 가장 비난했던 인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빨갱이'라면서 정권 내내 비판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의 비난은 신경 쓰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 때도 똑같았다. 사이토 총독과 이완용을 칭찬했다. 윤봉길 의사에 대해선 '흉악한 행동을 했다'면서 '흉행'이라고 평가했다."
- 그러나 과거 공화당과 민정당에서 활동한 이력을 놓고 '친일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라는 지적이 이어진다.
"인정한다. 그런 비판할 수 있다. 1970년대 초 대학 졸업할 당시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다. 그때 서울대 문리대에 '안내문'이 붙었다. (공화당에서) 공채한다고. 다른 당은 없었다. 그렇게 공화당에 들어가 사무직원을 했다. 이후 공화당이 민정당으로 바뀌었다. 계속 당직자로 일했다. 그런데 1990년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합당'이 발생했다. 이때 노무현, 김정길, 이철 등과 함께 논의해서 나오게 됐다. 그때 40대 초중반이던 나는 당시 동지들에게 말했다. '(한일협상 반대로) 감옥 갔다오고 당에서 일했다. 이후 당신들이 고생하며 감옥을 왔다 갔다 할 때 나는 따뜻한 밥을 먹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것을 원죄라 여기고 원칙에 충실하며 살 것이다'라고. 그때부터 나는 내 이름 걸고, 더 철저하게 몸가짐을 바로 하면서, 단재 신채호와 백범 김구의 노선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 하지만 이후에도 한나라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꼬마민주당 시절 15대에서 낙선한 이후 노무현, 이철, 유인태와 함께 했다. 당시 '하로동선'이라는 식당을 함께 꾸렸다. 문제는 당시 우리들에게는 힘이 없었다. 이기택 총재가 모든 권한을 행사하던 시절이었다. (이 총재가) 조순과 상의하더니 한나라당이 된 거다. 한나라당 내에서 활동하게 된 이유다. 그런데 이후 남북문제에 있어서 이회창 총재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나중에는 '민족적 관점에서 벗어난 당론에는 승복하지 않겠다'라는 말도 했다. 그렇게 해서 한나라당 시절에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냈다. 사립학교법 개정안도 발의했다. 일제강점기 진상규명법도 만들었다. 전부 한나라당 내에서 한 일이다. 당과 관계없이 진행했다. 그런데 2년을 그렇게 했는데 잘 안되더라. 결국 대선 지지율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3등일 때, 혼자 나와 개혁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일조했다. 비록 내가 한나라당에 있었지만, 행보는 명료했다. 나를 부역자라고 말하는 건 동의할 수 없다."
- 광복절 경축사가 문재인 정부 지지율 하락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면 전환용이라는 지적이 있다.
"결코 아니다. 주택문제와 검찰개혁 등 여야 쟁점에 대해선 일체 말하지 않았다. 오직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광복회가 친일청산을 말하지 않으면 누가 그 문제를 말하겠나. 무엇보다 지금 시점을 놓치면 친일청산은 불가능하다. 민주당이 과반을 넘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강조하고 언급한 거다. 광복절 경축사 후 독립유공자 유족들로부터 엄청난 전화를 받았다. 이제야 광복회답게 말했다고. 일관되게 밀고 나갈 것이다."
- 결국 현충원에 묻힌 친일파 강제이장, 끝까지 간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정면돌파만이 답이다. 반대하는 의원들 명단 작성해서 발표할 예정이다. 독립군을 토벌했던 친일파들이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이는 좌우의 이념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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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웅 "독재정권서 일한 것 원죄지만... 노무현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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