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탄핵동의안이 통과되자, 김근태 원내대표와 임종석 의원이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옆에있던 정동영 의장과 김희선 의원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종호
2003년 11월 친노 세력은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노 대통령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는 등 논란에 휩싸였다. 이를 빌미로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등이 연합해 2004년 3월에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발의해 이를 통과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1년 만에 대통령 직무를 정지당했다. 하지만 국민 여론은 오히려 노무현에게 우호적이었다. 그해(2004년) 4월 15일 대통령 직무 정지 중에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가 넘는 152석을 얻어 16년 만에 여대야소 국회가 탄생했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함으로써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7대 국회가 개원되자 열린우리당은 다수로 국가보안법 폐지, 언론관계법 개정, 사립학교법 개혁, 과거사 청산법안 등 4대 개혁 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여기다가 수도이전법안까지 상정했다. 그러자 보수단체와 기독교단체 회원 등은 국가보안법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사립학교법 개정을 종교 탄압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는 집권 당의 전략 부재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개혁 법안을 드민 감이 없지 않았다.
4개 개혁 입법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진보간 치열한 논쟁을 첨예하게 벌이는 가운데 그해 10월 21일 헌법재판소가 수도이전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런 가운데 2005년 4월 30일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23곳 선거구 가운데 단 한 석도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노무현은 특유의 승부수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의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이를 거절하면서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도 열린우리당은 완전히 참패했다. 그와 동시에 노무현의 지지도는 10%대로 추락했다.
17대 대선 두 달을 앞두고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세상의 눈은 온통 대선에 쏠렸고, 그 뒤로는 새 대통령 당선인에게 이목이 쏠렸다. 노무현은 그가 바라던 정치 개혁도, 정권 재창출도, 두터운 보수의 완강한 저항을 뚫지 못한 채 임기를 마쳤다. 2008년 2월 25일 새 대통령이 취임하자 노무현은 그날 청와대를 떠나 고향 봉하마을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