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시 탐진촌요와 상징그림다산 정약용의 시 탐진촌요와 상징그림
이승철
'죽란시사'는 정약용이 이웃에 사는 남인계 선비들과 조직한 친목모임이다. 참가자는 이유수ㆍ홍시제ㆍ이석하ㆍ이치훈ㆍ이주석ㆍ한치응ㆍ유원명ㆍ심규로ㆍ윤지눌ㆍ신성모ㆍ한백원ㆍ이중련ㆍ채흥원ㆍ정약전ㆍ정약용 등 15인이다.
모임의 '시첩(詩帖)'에서 정약용은 "15인은 서로 비슷한 나이로 서로 바라보이는 가까운 곳에 살면서 태평한 시대에 출세하여 모두 문과 급제로 벼슬길에 올랐고, 그 지향하는 취향도 서로 같으니 모임을 만들어 즐기면서 태평한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은가."라고 의미를 담았다. '죽란시사'의 규약이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번 모이는데,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 등을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한다.
모임은 나이 어린 사람부터 시작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고, 한 차례 돌면 다시 이어 간다.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주선하고, 수령으로 나가면 또 주선하고, 벼슬이 승진되면 그 사람이 주선하고, 자제 중에 과거 급제자가 나오면 또 그 사람도 주선한다. 이에 이름과 규약을 적고 제목을 '죽란시사첩'이라 했는데 '죽란'이 있는 우리 집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그동안 죽란시사첩의 서문인 '죽란시사첩서'만 전해왔는데 2012년 성균관대 안대희 교수가 「익찬공서치계첩(翊贊公序齒稽帖)」을 발굴하여 이듬해 7월 『문헌과 해석』에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익찬공서치계첩>은 다산을 포함한 남인 관료 15명의 명단을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한 '서치(序齒)'와 모임의 규약인 '사약(社約)'을 담아 첩으로 묶은 필사본이다. 서치에는 회원들의 이름, 자(字), 생년 월일이 정확히 기록돼 있으며 다산이 서문에 쓴 순서와 일치한다.
또 서문에는 회원끼리 나이 차가 많이 나면 거북하다는 이유로 회원의 연배를 다산의 위아래 네 살 이내로 제한했다고 써있는데 서치의 명단은 그 기준에도 들어맞는다.
8개 조항으로 된 사약의 내용도 서문의 내용과 부합하되 좀 더 자세하다.
"아들을 낳은 계원이나 자녀를 결혼시킨 계원, 지방 수령이나 감사로 나간 계원, 품계가 올라간 계원은 모두들 본인이 잔치를 마련한다"
"매년 봄가을에 날씨가 좋으면 각 계원에게 편지를 보내 유람할 곳을 낙점하고 꽃을 감상하거나 단풍을 구경한다."
사약에는 서문에는 없는 '벌칙'에 대한 조항이 있다.
"연회할 때 떠들썩하게 떠들어서 품위를 손상시키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주고, 세상 사람의 과오를 들춰내 말하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준다."
"모두와 함께하지 않고 사사로이 작은 술자리를 갖는 계원에게는 벌주 석 잔을 준다. 까닭 없이 모임에 불참할 때에도 벌주 석 잔을 준다." (주석 6)
안 교수는
"사실 죽란시사는 창작 서클의 차원을 넘어 남인 정치세력을 결집하는 모임이었는데, 외부에 정치적 결사로만 보여 공격당할 것을 우려해 규약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주석 7) 고 설명했다. 이 모임은 1796년부터 정약용이 1797년 윤 6월 곡산부사로 나갈 때까지 15개월 동안 활발히 활동하고, 그 뒤로도 가끔 모였다.
주석
6> 『동아일보』, 2013년 7월 29일.
7>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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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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