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여파로 교육부가 내달 9일부터 고3·중3 학생들을 시작으로 단계적 원격수업을 토대로 한 '온라인 개학'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3월 31일 오후 원격교육 시범학교로 지정된 서울 마포구 서울여자고등학교 3학년 교실이 텅 비어 있다. 개학이 연기되면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과 수시·정시모집 등 대학 입시 일정도 12월 3일로 2주 연기됐다.
연합뉴스
교육 개혁의 일환으로 야심차게 도입한 자유학년제의 예고된 파행이 그 단적인 예다. 자유학년제는 아이들에게 진로 탐색 기회를 부여한다는 취지로, 서구의 갭이어(Gap-year) 등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해보도록 유도하는, 나름의 의미 있는 시도였다.
문제는 시기였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 중학교 졸업 즈음이나 고등학교 때가 아니라,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중1 아이들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진로 탐색이라는 낱말조차 어색해하는 그들에게 1년이라는 시간은 그저 '시험이 없는 한 해'로 여겨질 뿐이다.
자유학년제를 굳이 중1 시기로 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보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실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게 적확한 질문일 성싶다. 물론, 입시 준비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자유학년제로 인해 학력이 떨어졌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오는 형국이다.
하지만, 아이들에 따라서 자유학년제는 입시 준비를 위한 '블루오션'이다. 한 해 동안 시험은 없지만, 중1을 대상으로 한 사교육은 말 그대로 문전성시다.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는 논다는 게, 자유학년제에 대한 중1 아이들과 학부모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2014년 처음 도입된 뒤 2016년 모든 학교에서 전면 실시되었으니, 지금 내가 교실에서 만나고 있는 아이들이 자유학년제 1세대인 셈이다. 처음엔 '자유학기제'였다가 2018년부터 전체 중학교의 절반 가까이가 한 학기를 더 늘려 운영 중이다. 두 해 동안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고 여긴 걸까.
'좀비들의 소굴'로 전락한 고3 2학기 교실
뜬금없이 자유학년제를 떠올린 건, '좀비들의 소굴'로 전락한 2학기의 고3 교실 풍경 때문이다. 물론, 애먼 자유학년제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교육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아무리 좋은 제도를 끌어와 쓴다 해도, 지금의 대학 입시 아래에서는 백약이 무효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수시 모집 원서 접수가 마감되고 닷새간의 명절 연휴가 끝난 뒤 고3 교실은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수시 합격을 자신하는 아이, 수능 최저를 대비하는 아이, 정시에 목매단 아이, 거기에 대학 진학에 별 관심이 없는 아이까지 마구 뒤섞여 있다. 수업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수시 모집에 하향 지원했다며 이미 합격한 양 호들갑 떠는 아이에겐 수업은 취침 시간이다. 그렇다고 수능 최저를 맞추려는 상위권과 정시에 대비하는 경우라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 수능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수업하기보다 차라리 자습 시간을 달라고 요구한다.
반 전체 27명 중 10명 가까이 책상에 엎드려 있고, 대여섯 명은 다른 응시 과목 공부를 하고 있으며, 아예 교실 밖 복도에 나가 자습하는 아이도 서넛쯤 된다. 한 반에 수업을 듣는 아이가 고작 열 명 안팎이라는 거다. 그나마 그들의 게슴츠레한 눈은 절반쯤 감긴 상태다.
이는 특정 교과만의 문제도 아니다. 교육과정이야 그럴 리 없지만, 3학년 2학기에 개설된 모든 과목은 자습 시간으로 운영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아무리 수업 능력이 출중한 교사라도 고3 2학기라는 수렁에 빠지면 자괴감으로부터 헤어나기 힘들다고 고백한다.
여느 때라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채찍 삼아 을러도 볼 텐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3학년 2학기 성적은 입시에 아예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시 모집 원서 접수 직전 생활기록부가 마감되다 보니, 대개 9월 중순부터 졸업 때까지는 '기록되지 않는 학창 시절'인 셈이다.
참고로, 수시 모집에서는 3학년 1학기까지의 성적과 비교과 영역의 활동만 반영된다. 오로지 수능 성적만 반영되는 정시 모집은 아예 생활기록부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교내 시험 기간은 그들에게 차라리 휴가 기간이다. 시험마저 그럴진대, 수업 태도는 안 봐도 비디오다.
물론, 교육과정상 3학년 2학기에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치러야 한다. 말이야 중간과 기말이지만, 아이들의 수능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아무리 늦어도 10월이면 모든 교내 시험이 끝난다. 중간고사를 치른 뒤 바로 다음 주에 기말고사를 치르는 학교도 적지 않다.
문제는 3학년 2학기 교내 시험은 그저 '교육과정을 위한 시험'이라는 점이다. 고등학교가 6학기로 구성되어 있기에 필요한 절차일 뿐, 여느 때처럼 시험을 대비해 공부하는 아이는 없다. 심지어 공지된 시험 시간표는커녕 시험 기간조차 모르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게 어디 어제오늘의 일인가요?"
수업하기 힘들다는 푸념에 동료 교사는 물론 아이들조차 같은 반응을 보인다. 오래된 관행이라는 인식에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좌절감이 얹힌 답변이다. 학급 담임만 아니라면 3학년 수업 전담이 '꿀 보직'이라며 키득거리는 일부 철딱서니 없는 교사도 있을 정도다.
대학 입시에만 반응하는 고등학교 교육은 '파블로프의 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문가입네 하는 사람을 죄다 불러 모아 입시 제도를 뜯어고치고 교육 개혁을 부르댔지만, 이 사실만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변화와 개혁의 '기회비용'이 바로 사라진 고3 2학기다.
3년 고등학교 과정의 1/6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교육 개혁이라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3 2학기는 각 대학이 응시 모집 단위의 합격자 변별을 위해 필요한 시간일 뿐, 정작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안중에도 없다. 대학이 과연 신입생들에게 그 1/6의 시간을 보상해줄 수 있을까.
진정한 교육 개혁은 대학 입시 너머에 있다. 이것도 개혁이랍시고, 정시 비율을 놓고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학종과 수능 사이의 밑도 끝도 없는 공정성 논쟁에 휘말려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교육 당국의 무책임과 무기력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대체 언제까지 수술이 필요한 환부에 애먼 진통제만 투여할 심산인가. 당장 대학 입시를 폐지하고, 대학을 평준화하는 개혁을 추진하자. 황당하다고? 지금 고3 교실을 가본다면, 그 누구도 한낱 이상주의자의 망상으로 치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고3 교실은 학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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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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