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일행 앞으로 여객선이 보인다.
한톨
제주의 '만들어진' 간첩들 역시 제주만의 특징이 있다. 많은 제주도민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중 상당수가 일본에서 애써 모은 돈을 제주의 학교 건립이나 마을 발전을 위해 기부했다. 그러나 공안기관에서는 교포들의 애향심을 북한의 공작금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시켜 간첩 사건으로 조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첩 사건에 평범한 도민부터 유명 인사들까지 많은 사람이 연루됐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첫째는 1965년에 발생한 소위 민족민주혁명당(오진영 사건) 사건이다.
과거 제주 시내에는 고택수 의원(현 제주공항게스트하우스 자리)이라는 병원이 있었다. 제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병원이었다. 이 병원을 운영하던 고택수씨는 1964년 일본 교토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에는 외국 유학으로 박삭 학위 이상을 받은 의사가 드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박사 학위 취득 그 자체로 큰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고택수씨의 박사 학위 취득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고택수씨와 함께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대개 한림읍 명월리 사람들이었는데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64년 도쿄올림픽을 구경하고 온 사람들이다. 공안당국은 이들 중 오진영씨가 일본에서 만난 친척이 조총련 관련자이고 이 사람으로부터 받은 용돈이 공작금이라며 고택수씨 포함해 함께 만났던 지역인들을 간첩으로 조작했다. 재심에서 모두 무죄가 나왔다.
둘째는 1971년에 김녕중학교 교장이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이다. 어릴 적 잘 알던 재일교포가 오랜만에 제주도를 방문해 김녕중학교 건물 증축비를 지원해 주었는데 이 돈이 북한의 공작비로 둔갑한 것이다.
셋째는 1977년 강우규 사건으로 재일교포 사업가를 비롯한 제주교대 학장과 국회의원 비서 등 11명이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대규모 사건이다. 고 강우규씨를 비롯한 6명은 복역 후 자신들의 사건이 조작되었다며 재심을 신청하였고, 사건 발생 38년이 지난 2016년 6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제주교육대학 김문규 학장과 그의 친구인 재일교포사업가가 차 한 잔 함께 마신 것이 포섭과 회합으로 둔갑해 졸지에 간첩까지 된 억울한 사건이었다.
이 외에도 1968년 일명 만년필 간첩 조작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가 지난 2019년 8월 41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김태주씨와 동생들의 삼 남매 사건도 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사촌 동생으로부터 만년필을 선물 받았을 뿐인데, 이 만년필이 북한의 천리마운동을 찬양하기 위해 제작한 김일성의 하사품으로 둔갑해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것이다. 아쉽게도 김태주씨는 무죄 선고를 19일 앞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 사법부의 사죄를 듣지 못했다.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 34%가 제주 출신
제주사람이 연루된 조작간첩 사건은 적지 않다. 지금까지 제주에서 간첩으로 조작되었다가 무죄가 선고된 사람들은 확인된 사람만 김평강·허간회·양한병·양동우·오재선·오성재·김태주·강광보·임문준·허두복·김용담·강희철·이장형·오경대·고남일 등 십여 명이다. 이들은 모두 만들어진 간첩이었다.
2006년 천주교인권위원회 자료를 보면 전체 조작 간첩 사건 109건 가운데 34%인 37건의 당사자가 제주 출신으로 집계되었다. 제주도 인구가 전국 인구의 1%가량이라고 보면 인구 대비 두 세 배 많은 간첩 조작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도대체 조작간첩 사건에 유독 많은 제주사람이 연루된 이유는 무엇일까?
강광보의 구술 = "(생가가 없어진 것은) 내가 일본에서 와가지고 한 82년도인가 없어졌을 거야... 기억이 다 떠오르지. 건물이 두 채였거든. 다른 집은 방이 두 개였는데 우리 집은 방이 세 개, 집이 컸어. 소하고 말을 길렀어. 할머니도 살아계시고. 일본에 있을 때 집 생각 많이 났지. 옛날 내가 살던 곳이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고향 생각이 없었으면 난 일본에 살았을 거야. 친구들은 다 거기 살고 있거든.
그런데 나는 일본 갈 적부터 일본에서 오래 살 마음이 없더라고. 그래서 상대방(아내)도 그런 사람을 골랐고. 내가 가자하면 올 수 있는 사람을. 그래서 내가 한국 들어온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왜 옛날 살아봤는데 또 들어가려고 하느냐고. 그런데 왠지 난 일본에 정착할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 언젠간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그런 생각만 들었지. 그래서 저번에 (일본에) 갔을 때 그 친구가 나에게 말하더라고. 지금 영주권 주면 일본에서 살 수 있겠느냐고. 웃으면서 나는 말을 안 했지만 제주에 돌아온 것을 후회는 안 해."
강광보씨처럼 제주 조작 간첩은 돈을 벌려고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밀항해 건너간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건너간 일본 교포사회에는 다양한 국적과 이념이 있었다.
특히 4.3사건 이후 살아남으려고 제주를 떠나 일본에 와 오래도록 남한과 북한 어느 국적도 선택하지 않고 무국적으로 사는 '조선적' 재일조선인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