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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에게 국가 훈장? 제발 공약부터 지켜라

'전태일50' 홍세화 편집위원장 특별기고문

등록 2020.11.10 17:43수정 2020.11.1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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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0월 26일 홍세화 <전태일50> 편집위원장이 경기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있는 전태일 열사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2020년 10월 26일 홍세화 <전태일50> 편집위원장이 경기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있는 전태일 열사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한겨레신문' 박승화 기자
 
1970년 11월13일. 우리는 비슷한 연배였고, 몸도 가까이 있었다.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과 동숭동 대학로, 물리적 거리는 지척이었으나 사회적 거리는 아주 멀었다. 한 노동 청년이 근로기준법과 함께 자신을 불태워 산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귀에 쟁쟁한 울림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현장을 찾아가는 길, 주먹으로 연신 훔쳐야 했던 눈물은 통한과 자성의 그것이었고, 사회적 거리를 물리적 거리만큼 가까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알아야 했다. 폭압적인 독재는 수단일 뿐 궁극적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근로기준법조차 지키지 않는 독재체제도 극복해야 할 과제였지만, 그 뒤에 노동 착취와 수탈의 자본주의체제가 숨어 있다는 것을. 대학생이라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때의 낭패감이란! 학습해야 했다. 혹은 용접기술을 배우겠다고 나서기도 했고 탄광을 찾아가기도 했다. 물론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나미 서점에서 나온 <정치경제학> <공산당 선언>을 읽겠다고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친구도 있었다. 아직 복사기가 없던 시절, 노트에 깨알같이 옮겨 쓴 글을 몇몇이 돌려 읽었다. 아직은 개별 차원에 머물렀지만, "철학은 프롤레타리아한테서 물질적 무기"를,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에서 정신적 무기를 발견(마르크스)"하는 노학연대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전태일은, 근로기준법과 함께 "내 죽음 헛되이 말라"며 산화한 그의 불꽃은, 젊은 가슴들을 타오르게 한 프로메테우스의 불이었다.

당신의 무덤 앞에 질문을 던진다

폭압적 박정희-전두환 독재체제는 완강했다. 80년 광주항쟁이 분수령이었고 마침내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투쟁은 중대한 변곡점을 찍었다. 그 뒤에도 수구 세력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지난한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고문당하고 투옥되었고 산화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180번 구류 처분을 당했고 3년 넘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실상 이 땅의 민주화는 노동 분할과 배제의 신자유주의를 동반했다. 노동을 분화, 위계화하여 상층(대기업 정규직)은 포섭하고, 하층(비정규직)은 차별, 배제하는 것이다. 더는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라 단결이 무너졌고, 차별이 제도화되면서 연대도 사라져 갔다. 노동 관련법은 민주화를 비웃듯 여전히 "힘센 자의 권리(크로폿킨)"로 남아 있다. 5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업장에는 50년 전에 전태일이 지키라고 외쳤던 근로기준법조차 적용되지 않는다.

수많은 간접고용 노동자들, 특수고용노동자들, 플랫폼 노동자들, 그리고 공무원들과 교사는 노동기본권에서 배제된 채다. 거의 모든 파업을 불법화하여 손배, 가압류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옥죄는 반면, 산업재해로 매년 2000명 이상이 일터에서 죽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미뤄지고 있다. 전태일 열사에게 국가최고훈장을 수여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제발이지 공약을 지키고 법을 개정한 뒤에나 추진하라.


사람들이 4차산업혁명을 말한다. 인공두뇌, 로봇, 플랫폼 자본주의, 알고리즘… 노동의 지위는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추락하고 있다. 고용 없는 저성장 시대, 단결도 연대도 기대하기 어려운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들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전태일의 무덤 앞에서 이 질문을 던지고 또 던져야 했다.

나는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도 '노동존중사회'를 말하고 있지 않으냐고? 하지만 분명히 하자. 노동이 실제로 존중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제기해야 하지만, 노동이 존중받는다고 할 때 노동은 객체이지 주체가 아니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노동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해방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자본과 노동 계급 간 세력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다.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 대부분이 몸은 노동자이지만 의식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존재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한 개별화된 개인을 구성할 뿐이고, 그들의 존재조건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 계급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단순명료한 이유로 정치적 대표를 갖지 못한다." 오늘 한국 노동자 대부분의 모습이 마르크스의 말 그대로 아닌가.

그람시가 강조한 문화적 헤게모니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를 간단히 왜곡시킨다. 그에 따르면, 산업사회는 노동자들의 정신 속에 '가짜 의식'을 주입할 목적을 가진 문화적 헤게모니 수단을 갖고 있다. 학교, 정당, 교회, 매스 미디어 등이 그것이다. 오늘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세계를 채우는 매스 미디어는 대부분이 정치인, 연예인 등 유명인들의 서사와 발언, 신변잡기로 꾸며지고, 노동자, 서민은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만 등장한다. 그것도 숫자로만. 서양 격언에도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도 없다(Out of sight, out of mind). 사람들의 감정이입도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한다. 전태일의 풀빵이 상징하는 연대정신은 노동과 진보의 중요한 덕목이다. 계급의식이 없다면 감정이입을 통한 연대정신이라도 기대해야 하는데, 그조차 상층에로의 일방으로만 이뤄진다. "우리가 김용균이다!"와 "우리가 조국이다!"를 비교해 보라.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자. 나의 의식은 초중고에 두루 있는 사회 교과목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한 게 거의 없다는 점에 대해 알고 있는가. 우리가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다면 사회 시간에 가장 중요하게 공부해야 할 게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의 의식은 16-14-13-12-10-8의 숫자 나열에서 로또 번호를 떠올리는 대신 자본주의 체제 아래 노동자에게 요구되었던 하루당 노동시간의 개략적인 변화를 읽어낼 줄 아는가. 나의 의식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에 "일하기 좋은 나라!"라고 받아칠 줄 아는가. 그렇지 않다면, 노동자인 내 안에서 노동은 이미 지고 있다. 요컨대, 진보정치든, 노동운동, 교육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이든, 그 궁극적 목표를 노동과 자본 계급 사이의 세력 관계에 변화를 이끄는 데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해방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잠시 쉬러 간다네…"

반세기를 더 살아 초췌하게 늙은 몸이건만 흔들리고 가슴이 저며 온다. 무슨 말을 덧붙일 것인가. "나의 나인 그대들"이 오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며 프레카리아트라고 말하는 것조차 사족에 지나지 않을 것임에.

*이 칼럼은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제작된 <전태일50> 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전태일50> 신문 제작에는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오늘의 전태일' 이야기를 신문으로 만들겠다는 현직 언론사 기자, 사진가, 활동가들이 참여했습니다. ☞ 구독신청
#홍세화 #전태일 #전태일5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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