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오성산 패러글라이딩군산은 취미와 문화생활의 본거지로 안성마춤이다
황승희
엄마 아빠는 딸 보러 군산을 몇 번 다녀가시더니 대번에 "군산 좋구나" 하셨다. "잘 됐네. 엄마 아빠도 내려오시는 거 어때요?" 바로 튀어나온 이 말이 특별한 귀농의 마중물이 될 줄이야.
엄마 아빠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자식 신세 안 져야, 하고 뒷방 늙은이로 주저앉는 건 할 게 못 된다 여기신다. 얼마 전부터는 호젓하니 염소나 닭을 먹이며 텃밭 농사 할 손바닥만 한 땅 하나 있었음 했다. 집 앞마당 손톱만 한 텃밭은 성에 안 찼다.
지금 연세에도 꿈이 있다니. 또래 친구들 부모님에 비하면 정말로 내가 두 손 모아 감사한 일이다. 그걸 내가 해드리면 내 부모님의 여생으로 여기 군산도 괜찮겠다 싶었다. 난 비혼주의자로 살면서부터 언젠가는 부모님을 케어해야지 했었다. 그때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사실 답은 내 마음에 있었다. 부모님이 더욱더 그리워진다.
딸인 나보다 아들의 든든함을 어찌 모르랴. 다만 아들네의 대도시 생활이 당신들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걸 내 아는 바, 이 현실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오빠. 엄마 아빠 아직 건강하시지만 연세도 있고, 내가 여기에 자리 마련해서 근처에서 같이 지낼게."
"그러니까 여든에 머더러 평생 살던 곳을 떠나 굳이 이사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노인네 고생만 하지. 거기는 형제, 이웃, 친구도 없는데 엄마 아빠 심심해서 못써."
오빠의 의견까지 잘 들었다. 설득은 필요가 없었다. 늙음이란 관념이다. 언제부터 노인이라 할 수 있는가. 노인이냐 아니냐는 연금 탈 때 말고 사실 의미가 없다. 오늘 할 수 있는 것, 내일 하고 싶은 것이 있냐 없냐가 중요할 뿐. 우리 아빠는 진정한 프런티어이다. '엄마 아빠의 특별한 귀농'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직장 12년 다니며 모은 돈으로 땅을 사기로 했다.
아빠의 귀농에는 더 큰 계획이 있었다
아뿔싸.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아빠가 생각한 손바닥만 한 땅에는 집터와 텃밭, 비닐하우스, 염소 울타리, 원두막, 거기다 주차장까지 다 들어가야 했다. 이건 교회만 없지 중세의 장원이 아닌가. 진정 손톱과 손바닥의 차이를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