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학사일정내용은 길지만 등교일은 단 3일이었다.
신은경
올해(2020년) 봄에 개학이 미뤄질 때 이런 상황까지는 상상도 못했었다. 더운 여름이 되면 바이러스가 소멸될 줄만 알았었다. 나름 청정지역이라고 안심했던 군산(내가 사는 곳)도 3차 대유행은 비껴가지 못했다.
처음이었다. 집 밖에 나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타야하고 누군가를 마주치는 일이 공포로 느껴진 것은. 바쁘다는 핑계로 이용하던 인터넷 장보기는 또 다른 의미로 필수적이 되었다. 만남이 꺼려지고 모르는 사람, 불특정 타인이 두려웠다. 택배기사와 배달기사와는 SNS를 이용한 비대면 방식을 사용했다.
쉽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일상은 이어졌다. 나는 무엇을 하려다가도 '코로나 때문에 못해'라는 핑계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다 돌이켜보니 한 해가 다 지나있었다. 봄에는 처음 겪는 팬데믹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다. 최악의 상황이 나열된 기사를 보며 걱정만 일삼았다.
'최선의 공격은 방어다'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일상을 살아가기로 했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내 일상을 되찾고 싶을 뿐이었다. 코로나19로 겪는 어려움을 글로 썼다. 오마이뉴스에 그 글을 송고하고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기자들의 기사로 힘을 얻었다.
용기를 가지고 다른 시야로 살펴보니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였다. 내 주위를 비롯한 사회는 비대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학교 수업도, 친구와의 만남도, 일도 비대면으로 가능했다. 처음에는 예전과 비교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던 나도 비대면에 익숙해져갔다.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나와 아이들은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24시간을 집안에서 공유하면서 나는 새삼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해했다. 삐걱거리던 톱니가 제 칸을 찾아가면서 나와 아이들의 생활도 맞물린 톱니처럼 잘 굴러갔다.
시간이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같이 있으니 뭐든 같이 할 수 있었다. 책도 같이 보고 TV도 같이 보면서 나와 아이들은 할 이야기가 더 늘었다. 올해는 5·18 40주년이어서 TV에서 방송하는 기념식을 같이 보았다.
아이들은 그 옛날 투사들의 마음을 공감했고 나는 올바른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서로가 읽은 책에도 관심을 가지자 분야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청소년 소설을 더 많이 읽고 아이들은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을 보며 생각의 폭을 넓혀갔다.
모임도 비대면 방식을 택했다. 내가 하고 있는 책모임과 필사모임도 SNS를 이용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은 어른들의 그 활동을 부러워했다. 나는 아이들과 '강물이 마이산과 함께하는 책읽기', '강물이 마이산과 함께하는 필사'라는 이름의 대화방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