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림케어드림(구 서림복지원)’ 임태성 원장장애인들과 함께 걸어가는 서림케어드림(구 서림복지원)’ 임태성 원장
최미향
문득 마음껏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삶의 언저리가 때아닌 아픔으로 다가올 때는 서럽게 울고 하늘 한번 쳐다보면, 또 서서히 괜찮아질 때가 있었다. "왜 나만 아프고 힘들까요?"라고 묻다가도 어느날 바람 한 번 슬쩍 지나가면 또 그 자리가 세상 가장 편안한 자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아플 때는, 힘들 때는 현실을 피하지 말고 내 안에 머루를 수 있는, 머물다 갈 수 있는 자리 하나쯤은 만들어 주자. 장담컨대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다. 이게 세상이고 이게 삶이다.
22일 만난 서산시 서림케어드림(구 서림복지원) 임태성 원장의 마음도 그랬다. 그에게 있어 큰딸의 지적장애 2급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발버둥 치며 현실을 부정했지만, 수녀님의 한마디 말씀에 그만 무릎을 꿇고 참회의 기도를 했던 임태성 원장.
"97세 할아버지에게 말동무를 해주는 것도, 심부름하며 살갑게 챙겨주는 사람도 바로 우리 큰아이다. 또 내 눈을 맞추며, 내가 살아가는 길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도 바로 이 아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고 우렁차다.
"오산동에 있는 1만 평을 기증하여 서림복지원(현 서림케어드림)을 짓는다는 아버지 말씀에 왜 굳이 복지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시절, 하지만 내 자식이 막상 장애인이 되고 보니 '이렇게 진행한 것도 다 운명이었구나!'란 생각을 했다."
직원들이 받는 급여 명세서 뒷면에 '이 급여는 우리 '서림케어드림' 장애인들이 지급합니다. 만약 생활 장애인들이 우리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중한 일터를 잃게 됩니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여 생활장애인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성심을 다합시다'란 글귀를 써넣은 장애인 생활공동체 서림케어드림(구 서림복지원) 임태성 원장을 찾아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 어릴 적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살이를 했는데 당시 기억나는 이야기를 해달라
"8남매 중 누나만 5명인 집에서 태어났고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해야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나가 5명이니 여자들 틈에 껴서 소변도 앉아서 누겠다는 부모님의 염려 때문이었다. 물론 단순히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서울로 올려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나중에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우리 집은 1957년부터 부춘동에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왔다. 그 덕에 나는 부춘국민학교에 다녔고, 자랑 같지만 4학년 때까지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5학년, 누나가 있는 서울로 전학을 했다. 하지만 올라간 그해 친 시험에서 나는 겨우 반에서 30등을 했고, 안타깝게도 이 등수는 6학년 때 올라갈 때까지 그대로 이어져 가족들을 실망시켰다.
성적이 도대체 뭐라고 내 나이 13살 6학년 때 못나게도 나는 처음으로 자살이란 단어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엄마도 없이 대학교 4학년 누님과 살았던 서울 생활, 부모님에 대한 보고픔과 성적에 대한 좌절, 그리고 빨리 찾아온 사춘기로 말수를 잃어가기도 했다.
그러던 차,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찾아올 줄이야. 서산시 운산면 출신 담임 선생님을 운 좋게 만난 나는 선생님이 운영하는 그룹과외반에 들어가는 기회를 얻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해 반에서 드디어 9등, 그리고 다시 5등을 하는 반전을 일으켰다.
당시는 교사라도 얼마든지 개인과외를 할 수 있던 때였다. 선생님은 고향 제자라고 그래도 나를 챙겨 반석(?) 위에 올려주는 호의를 베푸셨다. 선생님 덕분에 개미가 벽을 타고 올라가듯 한 땀씩 등수를 치고 올라간 나.
그렇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시험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면 엄마가 그렇게 보고싶어 몸살을 앓아야 했다. 서러워 눈물을 바가지로 흘렸던 시간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그립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