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전교조 교사들을 등에 업고 아이들에게 좌파 이념을 주입하려는 학교.'
혁신학교에 대한 보수 야당과 보수 언론의 일관된 정의다. 그들은 인과관계는커녕 별다른 상관관계도 없는 통계자료까지 끌어와 끊임없이 왜곡하고 폄훼한다. 출범 당시부터 지금까지 혁신학교는 그들이 진보적인 교육 정책을 비판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해온 소재였다.
급기야 얼마 전 국회에서 혁신학교에 대한 조항을 담은 초중등교육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발의되었다. 곽상도 국민의힘 의원을 비롯한 같은 당 소속 10명의 의원이 법안 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미비한 혁신학교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선의로 보긴 어렵다. 대표 발의자인 곽상도 의원은 지금껏 좌파 교육 운운하며 혁신학교에 줄곧 반대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선 일반 학교에 견줘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이 크게 높다며 혁신학교의 학력 저하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그때마다 보수 언론은 그의 주장을 베끼듯 기사화했고, 시나브로 혁신학교는 '공부시키지 않고 놀기만 하는' 학교로 낙인찍혔다. 해묵은 명문대 진학률과 학업성취도 평가를 기준 삼아 아이들과 학부모의 불안을 파고든 것이다. 와중에 혁신학교의 취지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당장 일부에서 혁신학교 지정을 두고 학부모 등 지역 주민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걸 문제 삼았다. 지정 또는 지정 취소 신청을 하려면, 교사와 학생, 학부모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항을 담은 이유다. 사전에 교육 주체들끼리 토론과 설득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거다.
문제는 다수결 외엔 타협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혁신학교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교실 환경이 미비하다거나 교육 수요자의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등의 그럴듯한 이유를 대지만, 이는 학력 저하에 대한 우려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결과'로 증명되지 않는 한 혁신학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다.
해당 개정 법률안의 핵심 내용은 누가 뭐래도 혁신학교에서 연 1회 이상 학생의 학업능력을 평가하도록 의무화한 조항이다. 이는 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에서 탈피하여 자기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학습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혁신학교의 설립 취지를 몰각한 독소 조항이다.
계량화된 점수로 환산되고, 다른 지역, 다른 학교와의 비교가 불가피한 평가가 의무화하면 수업의 혁신은 사실상 물 건너가게 된다. 대학 입시가 전국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쥐고 흔드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결국 무늬만 혁신학교로 전락할 게 불 보듯 환하다.
제안자들의 노림수인 셈이다.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게 나오면 반대 여론이 비등할 테고, 혁신학교는 울며 겨자 먹기로 기존의 문제 풀이 수업으로 회귀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혁신학교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나아가 이는 교육개혁의 좌초를 뜻한다.
굳이 법으로 학업능력 평가를 의무화하지 않아도, 혁신학교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민주적인 학교 운영과 수업 혁신이라는 대의, 그리고 학업능력 제고라는 현실이 그것이다. 온존한 학벌 구조와 대학 입시를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탓이다.
고등학교 과정의 혁신학교 운영이 어려운 건 그래서다. 최근 학생부종합전형 등 수시전형 확대 방침이 불공정하다는 여론에 밀려 주춤하면서, 혁신학교의 선호도가 낮아지는 등 부침을 겪고 있다. 혁신학교는 결국 교육개혁과 연동될 수밖에 없는 '순망치한'의 관계다.
수능처럼 획일적인 평가로는 수업의 혁신과 다양한 비교과 활동을 반영하기 힘들다. 발표와 토론 수업, 모둠 활동과 프로젝트 수업을 계량화된 점수로 나타내기란 불가능하다. 아이들의 학교생활 만족도나 자기 주도성을 선다형 시험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중학교 과정에서조차 조금씩 혁신학교에 대한 불안이 싹트는 듯하다. 고등학교 과정과는 달리 초중학교의 경우에는 여전히 학교생활 만족도가 높긴 하다. 지금도 자녀를 혁신학교에 보내기 위해 부러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혁신학교의 학력 저하에 대한 우려를 부추기는 보수 언론의 여론 공세가 먹힌 탓일까. 주위에 혁신학교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자녀는 일반 학교에 보내겠다는 이들이 최근 부쩍 늘었다. 그들은 대학 입시 준비를 중학교 때 시작하면 이미 늦는다며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그들은 처음엔 중학교까지는 혁신학교로 보내고 고등학교는 일반 학교로 보내겠다더니, 이젠 학교급이 한 단계 아래로 내려왔다. 초등학교만 혁신학교로 보내고, 중고등학교 6년 동안은 대학 입시에 '올인'하겠다는 것이다. 어쨌건 입시에선 혁신학교가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학벌 구조와 대학 입시가 변하지 않고선, 혁신학교가 일반 학교의 교육적 대안으로 뿌리내리기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자녀를 혁신학교에 보내려거든 대학 입시를 기꺼이 '기회비용'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듣는다. 자칫 교육적 이상을 좇는 이들끼리 모이는 고립된 학교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혁신학교는 상명하복의 관행에 맞서 상향식 교육개혁을 이끄는 의미 있는 실험이기도 하다. 우선, 혁신학교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중심을 두고 교육의 본령에 충실한 학교를 표방한다. 무엇보다도 취지에 공감한 교사들이 지원한 까닭에 집단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학 입시에 대한 부담과 학급당 학생 수 등 학교 안팎의 척박한 교육 환경을, 교사들의 자발적 의지와 의기투합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성적에 따라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을 교육의 주체이자 동반자로 인정하고 협력한다.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공동체로 여긴다.
그들은 학력 저하에 대한 여론의 질타에도 억울해한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 자율성과 자기 주도적인 공부 습관이 길러지면, 학업성취도의 향상은 필연이라고 자신한다. 한편, 과연 기존의 학업능력 평가가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핵심 역량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요컨대, 곽상도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번 개정 법률안은 혁신학교에 대한 여론의 불신을 부추기는 악법이다. 국민의 대표로서 대한민국의 미래세대를 걱정하고 진정 교육개혁을 바란다면, 대학 입시에 종속된 학교 교육의 위상을 재정립하도록 힘써야 한다. 언제까지 교육과정과 대학 입시가 별개인 현실을 묵인해야 하는가.
참고로, 현행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여섯 가지 핵심 역량을 나눠본다. 이는 아이들로부터 발현시켜야 할 가장 중요한 잠재 능력이며,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최고 목표다. 지금 학교가 이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지 성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혁신학교로 눈길이 가게 된다.
첫째, 자기관리 역량.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지식정보처리 역량. 이는 합리적 문제 해결을 위해선 기본적인 지식정보처리 능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셋째, 창의적 사고 역량. 기존의 다양한 경험을 활용해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능력이 미래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넷째, 심미적 감성 역량. 이는 감수성을 키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누릴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다섯째, 의사소통 역량.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능력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역량. 지역과 국가, 세계 등 공동체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진취적인 태도가 미래 사회에 무엇보다도 요구된다는 의미다.
교육과정이 학교 교육의 '헌법'이라고 할 때, 위의 여섯 가지 역량을 갖추도록 가르치고 평가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교육이다. 지금 대학 입시 준비와 수능을 비롯한 학업능력 평가가 과연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매번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고 눙칠 거면 교육과정은 왜 만드나.
말이 난 김에, 이번 개정 법률안의 교묘한 독소 조항을 하나만 더 언급하자. 혁신학교 지정 또는 지정 취소 절차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 삽입되어 있다. 물론, 법 절차에 처벌 조항을 두는 일이 특별할 건 없다.
다만, 업무를 처리하고 책임져야 하는 해당 학교장에게는 적잖이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잖아도 혁신학교 운영이 번거롭고 힘든데 법적 책임까지 떠안아야 하느냐며 손사래를 칠 우려도 있다. 의도한 건 아닐 테지만, 문득 학교장과 교사들을 이간질하는 비열한 조항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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