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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병 걸린 엄마와 가정폭력 아빠... 30년 후 그 딸은

[조기현의 영 케어러 ⑥ 마지막회] 가족돌봄 경험을 토대로 노동사회학 연구자가 된 아름씨

등록 2021.02.15 07:04수정 2021.02.15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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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돌봄'을 말할 때 떠오르는 얼굴들은 '중장년'입니다. 하지만, 분명 한국 사회에도 아픈 부모나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들을 지칭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효녀', '효자'로 불릴 뿐 사회적 주체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직접 돌본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작가가 자신과 같은 한국의 영 케어러들을 찾아나섰습니다. 이번 편은 그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조기현의 영 케어러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집자말]
 어머니는 천진한 표정으로 연신 아름씨에게 '아줌마'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천진한 표정으로 연신 아름씨에게 '아줌마'라고 불렀다.unsplash
 
"아줌마 누구세요?"

초등학생이었던 정아름(가명)씨가 집에 들어선 순간, 어머니가 물었다. 그의 유년기 기억 속에, '평범한 어머니'는 없었다. 어머니는 평소 대화가 잘 되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기피했다. 어느 날은 오빠에게 "하느님이다", "예수가 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차려준 음식에는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아름씨를 아예 알아보지 못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천진한 표정으로 연신 아름씨에게 '아줌마'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낯선 딸의 존재를 신기하게 바라봤고, 딸은 낯선 어머니의 행동을 불안하게 지켜봤다. 어머니의 정신이 더 멀리 달아날 것처럼 느껴졌다. 뭐라도 해서 먹여야 할 것 같았다. 서둘러 죽을 쑤어서 어머니의 입에 떠먹였다. 숟가락 한 번에 어머니가 다시 제자리로 한 걸음씩 돌아오길 바랐다.

"그때의 냄새, 분위기, 어머니의 아이 같은 표정, 아직도 기억이 나요."

지금 아름씨의 나이가 30대 후반이 되었으니, 거의 30년이 된 일이다. 그때 조현병 증상이 발현된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머니는 20년이 지난 후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영 케어러, 그 이후

지난 6개월 간, 나와 같이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만났다. 효자나 효녀, 심청이 등 가족 돌봄을 정당화하는 말이 아니라 '영 케어러'라는 새로운 말로 '우리'의 경험을 엮어보려고 했다.


'우리'는 학업에 열중하거나 진로 이행을 하는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 가족을 돌보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공통점을 모아보려고 했다. 어린 시기에 겪는 아픔과 돌봄의 경험이 다른 세대의 그것보다 유별나게 힘들다고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또래들과는 사뭇 다른 경험을 했고 그것이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함에도, 그 경험을 말하고 연결될 수 있는 '사회적 자리'가 없다는 데 큰 문제의식을 느꼈다.

내가 만난 청소년과 청년들 대부분은 아직 돌봄의 경험이 소화되지 않고 더부룩하게 쌓여 있었다. 현재 겪고 있는 일에 거리를 두고 성찰하기는 쉽지 않았다. 힘겨웠던 순간들을 직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분명 '시간'이 필요하다. 참조할 수 있는 '모델'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정아름씨를 만났다. 그는 한 동료를 통해 영 케어러라는 말을 알게 되었고,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영 케어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오빠와 함께 조현병을 앓는 어머니를 돌봤다. 아버지는 자주 술에 취해 있었고, 집에 있으면 어머니를 때렸다. 그게 일상이었다. 영 케어러이자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던 그는 커서 여성 폭력 상담사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고민하는 노동 사회학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가정 폭력과 돌봄의 경험을 어떻게 소화해냈을까? 그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어떤 결단들이 있을까? 어떻게 자신을 돌봤을까? 영 케어러의 고통뿐만 아니라 '그 이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듣고 싶었다. 지난 2월 1일, 그의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엄마, 어디 좀 아프고 우울하대"

"집에 있을 때면 늘 긴장을 늦출 수 없었어요. 공포의 연속이었지요. 언제 갑자기 조용하다가 다 뒤집어질지 모르고, 엄마가 무슨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으니까요. 엄마가 거의 매일 아프고, 정서적으로도 무너지니까 자기를 잘 추스르지 못했거든요. 쫓아다니면서 돌봐줬던 거 같아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평생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다. 파트타임으로 일했고, 남는 시간에는 노점상을 차려놓고는 막걸리를 마셨다. 어떤 일이든 남 탓부터 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밖에 몰랐고, 수틀리면 모든 걸 뒤엎기 일쑤였다.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와 결혼한 건 고작 스무살 때였다. 아버지의 행동을 보면 어머니의 조현병 발병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제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결혼 생활이었다. 

어머니는 힘들 때마다 증상이 악화됐다. 환청과 망상이 지속될 때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그럴 때마다 아름씨가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던 어른은 외할머니였다. 하지만 아름씨의 어머니는 첫째 딸이었고, 그 아래 이모들은 아름씨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았다. 할머니는 여전히 그들을 양육하고 있었다. 정말 큰일이 아니라면 도움을 주기 쉽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태가 삼상치 않으면 아름씨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가 집까지 오는 날은 어머니를 데리고 병원 가는 날이었다. 그럴 때마다, 한 달 정도는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한 달 동안 집에 오지 않는 이유를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엄마, 어디 좀 아프고 우울하대."

한 달이 지나면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름씨는 할머니가 병원에서 타다준 약을 배달해서 어머니에게 먹였다. 약을 먹이면 한동안 괜찮았지만, 아버지와의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매일 일어나는 폭력 속에서 어머니가 의지한 사람은 오빠였다. 반대로 폭력 속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은 집 안에서 가장 약자였던 아름씨였다.

아름씨는 늘 어머니의 미움의 대상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괴롭히는 남편을 피해 아들에게 의지하고, 딸에게 스트레스를 풀면서 겨우 살아갔다. 아름씨는 여전히 홀대 받았던 순간들을, 그때의 서운함을 기억한다. 그런 아름씨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람 또한 오빠였다. 남매는 서로를 챙겼고, 사건이 벌어지면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두 남매가 힘을 합친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은 한밤중에 대문이 열려 있었다. 아름씨는 그때 고등학생이었고, 오빠도 이제 막 성인이 된 참이었다. 급히 밖으로 나가자, 옷을 홀딱 벗고 거리를 쏘다니던 어머니를 마주했다. 놀랐지만, 놀랄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었다. 어머니를 집에 데려왔다.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야 할까, 아니면 어머니를 묶어두기라도 해야 할까. 남매가 밤새워 논의해도 적당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엔. 

"저나 오빠나 너무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일들을 겪어서, 문제가 생기면 어디 도움을 청하기보다 늘 우리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순간

학창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대학은 무조건 법학과를 가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을 것 같았고, 아버지와 같이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처벌을 받는 세상을 만들고 싶기도 했다.

대학은 집을 벗어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집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침 오빠도 군대에 간 시기였고, 아름씨까지 집에 없으면 집안일을 하거나 어머니를 챙길 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집에서 40분 거리의 대학 근처에 원룸을 얻어 피난 가듯 독립했다.

원하던 법학과에 진학했지만 제대로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대학을 다니는 것보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시간이 더 많았다.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했고, 집에 돈이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부쳐줬다. 일에서 일, 일에서 공부를 오가는 동안, 아버지의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다.

하루에 열 통도 넘게 걸려오는 전화가 아름씨를 괴롭게 했다. 그렇다고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혹시나 어머니를 때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전화벨은 곧 비상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모든 일을 제쳐두고 집에 달려가면, 별 일 아닌 경우가 허다했다.

아름씨가 대학생이라는 외피만 두르고 일에 몰두할 동안, 같은 학과 동기들은 온전히 대학생으로 지냈다. 탄탄한 배경이 있는 친구들은 법전을 열심히 들여다볼 여유가 있었다. 그들에게 미래의 성공은 그저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아름씨는 자신에겐 노력과 성공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있다는 사실을 그때 확인했다. 결국 노력도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단 둘이 보낸 시간들이 어떤 일들로 채워졌는진 정확히 모른다. 다만 아버지의 폭력은 여전했을 것이고, 어머니의 스트레스는 극에 다다랐을 것이다. 오빠가 제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사고가 벌어졌다. 어머니는 몇 십년간 지속됐던 아버지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했다. 셀 수 없이 맞았지만,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응징이었다. 아버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출혈, 응급실, 경찰 조사 등으로 범벅된 며칠을 보냈다. 이 사건은 늘상 있었던 집안의 사건사고 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남겼다. 그러자 그저 감내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여겼던 폭력과 돌봄 상황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더 이상 이렇게 버틸 수는 없었다. 

"문제를 알면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볼 수 있는데,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 못하면 길을 못 찾는 거죠.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는 좀 나아갈 길을, 조금씩 나아가는 길을 찾았던 거 같아요. 그때 어머니의 병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했고, 가정 폭력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어요. 스스로 공부하면서 해방감을 느꼈어요. 내가 왜 절망하고, 왜 죽고 싶었는지, 비슷한 사례도 보고 책도 읽었어요. 연민에 빠지지 않고 객관화하려고 노력했어요."

부모를 놓지 않기 위해, 나를 위한 일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서 꼭 마지막에는 저를 중심에 놓고 선택하며 살았어요." 아름씨는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거리감'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꼭 마지막에는 저를 중심에 놓고 선택하며 살았어요." 아름씨는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거리감'이 필요했다고 말한다.고정미
 
삶에 엮인 질문들을 풀어가다 보니, 대학원에서 젠더 법학을 공부하게 됐다. 젠더 법학은 가정 폭력, 성폭력, 성매매, 성희롱 문제를 법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결하려는 법학 분야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는 게 어머니가 겪었던 조현병의 사회적 원인을 해결하는 실마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공부할수록 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현실이 더 눈에 밟혔다. 좀 더 현실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때쯤부터 젠더 폭력 상담센터에서 상담 활동에 열중했다. 그리고 아름씨 자신도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자신을 겪었던 방임과 폭력, 돌봄의 시간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만약 여성이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폭력적인 가정에 붙잡혀 있었을까. 가정 폭력, 질병, 젠더 상담의 경험이 또 다른 현실의 질문과 맞닿았다. 노동사회학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원에 다시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그는 여성에게 안전한 일터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고민하는 노동 사회학 연구를 하고 있다.

아름씨는 7년 전 결혼했다. 남편이 공부할 때 아름씨가 돈을 벌었고, 아름씨가 공부할 때 남편이 돈을 벌었다. 서로가 둘도 없는 지원군이 됐다. 어머니는 지난 10여 년간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했고, 정신장애 3급 판정을 받기도 했다. 요즘은 감정 표현이 적을 뿐, 조현병 증상은 많이 나아졌다.

안정된 어머니의 모습에 아름씨는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본다. 치료 등의 효과로 호전된 것일 수도 있지만, 잘 살아가고 있는 딸의 모습이 만족감을 줬을 수도 있다. 어머니의 조현병을 단순히 증상으로만 보기보다, 삶의 맥락과 함께 이해하려는 습관이 뱄다.

아버지는 이제 노쇠해져서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빠는 직장을 다니며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 아름씨는 30대 후반이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다. 지금의 평범한 일상을 갖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아름씨는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거리감'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제가 의식적으로 가족한테 거리감을 만들었던 거 같아요. 너무 개입하면 제가 같이 무너지더라고요. 거리를 두고 내가 서있어야 돌볼 수도 있잖아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야 부모님이 일을 벌여도 나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고요. 마지막 순간에는 늘 저를 위한 선택들을 했던 거 같아요. 부모님을 안 놓으려고요. 끝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려고요. 그러기 위해서 꼭 마지막에는 저를 중심에 놓고 선택하며 살았어요."

누군가를 잘 돌보기 위해서 자기도 잘 돌봐야 한다. 너무도 당연해서 하나마나 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막상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름씨가 취했던 '거리감'이 그 쉽지 않은 일을 가능하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부터 잘 돌봐야 한다.
#영케어러 #조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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