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생일.나와 할머니, 동생 그리고 엄마.
김예린
'할머니는 언제부터 내 할머니였을까.'
두툼한 앨범 열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나의 세살 생일을 함께 축하해주고 있었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단편소설처럼 드문드문 새겨져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아홉 살 꼬맹이는 학교 숙제를 코팅해야 했다. 지금이야 종이와 코팅지를 뜨끈한 코팅 기계에 넣으면 빳빳하게 코팅되지만 1996년은 달랐다. 문방구에서 100원짜리 코팅지를 사서 비닐을 벗겨 눈대중으로 중앙을 맞춰 손을 파르르 떨어가며 수제(?) 코팅을 해야 했다. 수제 코팅은 공기가 들어가 쭈글쭈글해지거나 중앙을 비껴가 열에 아홉은 실패했다.
수제 코팅은 아홉 살에게 버거운 숙제였다. 엄마의 부재로 나를 돌보러 온 할머니에게 수제 코팅을 부탁했다. 할머니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할머니 이게 뭐야!"
공기가 들어가 울퉁불퉁해진 완성본을 보고 할머니에게 엉엉 울며 소리쳤다. 할머니는 아홉 살의 투정과 짜증을 받아내는 감정 쓰레기통이 됐다.
"에휴, 할머니가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네."
할머니의 눈물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는 얼음이 됐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목 안이 찌릿했고 멀뚱멀뚱 할머니 모습만 쳐다봤다. 어린 나는 짜증 부려서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리고 이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수십 번 바뀌었고 할머니 눈물은 희미해져 갔다.
"짠! 할머니, 내 왔다!"
할머니 집 문은 언제나 반쯤 열려있었다. 철문을 있는 힘껏 밀고 크게 불렀다.
"아이고, 예린이 왔나."
할머니는 구부정 허리를 굽힌 채 보라색 슬리퍼 하나씩 신으며 날 품에 안았다. 에메랄드 빛 보석이 박힌 커다란 목걸이가 내 눈 앞에서 왔다 갔다 춤췄다. 할머니는 두세 달에 한 번 만나는 나와 함께 100개가 넘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5000원입니다."
어두컴컴한 동네 구멍가게 계산대 앞. 할머니는 바지춤에서 지폐를 꺼내 침을 묻혀 하나 둘 셌다.
"더 먹고 싶은 거 없나."
"됐다, 마. 이거면 된다."
우유, 후렌치파이, 오렌지주스. 까만 비닐봉지에 든 간식거리를 흔들어대며 시멘트 계단을 뜀박질했다.
"아이고, 후. 린아 먼저 가 있어라."
무릎이 아픈 할머니는 언젠가부터 다리가 세 개였다. 지팡이가 한 번. 보라색 슬리퍼가 연달아 두 번 계단을 디뎠다. 계단 반쯤 올라온 할머니는 회색 시멘트 바닥에 앉아 숨을 돌린다.
"할머니 내 먼저 가 있을게."
한숨 돌리는 할머니를 뒤로 한 채 신나게 계단을 올랐다. 앞서 뛰다 숨이 가빠왔다. 눈두덩이 위로 땀이 삐질 흘렀다.
어떤 집이 전날 밤 제사였나 보다. 귀신 먹으라고 흰 종이 위에 생선 대가리랑 전을 내놨다. 비린내를 맡은 길고양이가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코끝에 탕국 냄새와 정종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았다.
할머니는 어디만치 올라왔을까. 생각하다 다시 계단을 힘차게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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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시골기자이자 두 아이 엄마.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시간이 쌓여 글짓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아닌 '김예린' 이름 석자로 숨쉬기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 짬짬이 글을 짓고,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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