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소장의 연혁과 일대기백기완 소장의 빈소 로비에는 백 소장이 걸어온 인생연혁이 전부 설명되어 있다.
유채하
장례식장 밖에서 읽어보고 갈 수 있는 공부거리를 발견했다. 백 소장의 생전 연혁이 담긴 작은 전시물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그가 거친 88년의 여행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삶의 여행을 통해 이루고 싶어 했던 목표와 세상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걸어온 모든 여정에는 그가 목숨만큼 중요히 여겼던 '민주주의'가 있었으며, 민주주의의 주인인 '민중'이 존재했다. 사회가 '없는 존재'로 취급하며 울리는 소리마저 막아버린 억울한 민중들 옆에서 백기완은 권력이 가진 마이크를 빼앗아 그들과 함께 외치고, 또 외쳤다.
그는 19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독재 투쟁에 뛰어든다. 통일문제연구소와 민족학교 등의 설립 과정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오던 백 소장은 1974년 '유신 헌법 100만인 철폐 운동' 에 앞장섰다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투옥되어 12년 형을 선고받고 다음 해 석방되었다. 이후 1979년 YMCA 위장결혼식 사건, 1986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12년이 넘는 옥살이하는 동안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백 소장은 투옥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반인권적 고문에 시달리며 신체적, 정신적 피해와 장애를 입었다. 81kg까지 나가던 건장했던 몸뚱아리도 순식간에 야위어버릴 만큼 그가 겪은 고문은 심각했다.
그러나 백 소장은 투쟁가에게 남은 결연 하나로 고통의 옥살이를 버텨냈다. 권력이 망가트린 그의 몸뚱아리가 투쟁의 종결의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부서진 몸뚱아리를 이끌고 다시 거리의 민중에게로 나갔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그가 발걸음을 향한 곳은 그의 결연함을 기다리는 민중들 곁이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군정종식을 위한 단일화 명분으로 사퇴한 백 소장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출마했으나 저조한 성적으로 낙선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받아든 성적표는 백기완의 삶을 결코 상징하거나 대변할 수 없다. 그는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부여하는 명예와 권력을 종착지로 삼고 거리에서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쟁하는 민중의 곁에, 그 민중이 어떠한 주제와 행색으로 앉아있든, 그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백기완의 삶이었다.
그는 고령이 된 2000년대와 2010년대까지도 꾸준히 원로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했다. 연설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권력을 향해 돌진하던 그의 젊음과 힘은 사라졌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영향력이 존재했고, 많은 이가 그를 필요로 했다.
양심수 석방부터 부당해고 문제, 청년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등 그가 목놓아 외치며 풀어야 할 억울한 민중의 이야기는 산더미 같았다. 자신이 평생을 몰두해온 통일운동과 행복한 공동체, 민중 모두가 자신의 마이크를 잡고 어떠한 권력 앞에서도 자유롭게 투쟁할 수 있는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그는 마지막까지 거리에서 싸웠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