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린 제102주년 3ㆍ1절 기념식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3·1운동이 개시된 역사적 장소인 서울 탑골공원에서 102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비 내리는 속에 거행된 이날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과 우리 사이에는 과거 불행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라는 말로 식민지배 문제를 꺼냈다.
문 대통령은 "오늘은 그 불행했던 역사 속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순간을 기억하는 날"이라며 "우리는 그 역사를 잊지 못합니다. 가해자는 잊을 수 있어도 피해자는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한국 정부는 언제나 피해자 중심주의의 입장에서 지혜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것"이라고도 했고, "우리 정부는 언제든 일본 정부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아래와 같은 발언도 있었다. 한·일 간의 인적·문화적 교류 및 무역관계 등을 거론한 뒤에 나온 대목이다.
"한국은 과거 식민지의 수치스러운 역사와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던 아픈 역사를 결코 잊지 않고 교훈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문제는 과거의 문제대로 해결해 나가면서 미래지향적인 발전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합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해결하면서 미래에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한다는 발언은 매우 당연하다. 과거보다 미래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라는 대목은 현재의 한국이 식민지배 문제로 인해 발목이 잡혀 있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고, 지금 상태가 계속되면 한국이 조만간 발목이 잡히게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
당연한 발언, 하지만
지난 1월 18일 신년기자회견 때 한일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은 문 대통령은 "우선 수출규제 문제가 있고, 강제징용 판결 문제가 있다. 그 문제들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양국이 여러 차원의 대화를 하고 있다"라며 "그런 노력을 하는 중에 위안부 판결 문제가 더해져서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그런 다음,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내각의 2015년 위안부 합의를 거론하면서 "한국 정부는 그 합의가 양국 정부 간의 공식적인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발언했다. 2018년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천명한 것을 뒤집은 것이다.
그런 뒤,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서도 일본의 입장을 배려하는 발언을 했다. "그런 부분들이 강제집행의 방식으로 현금화된다든지 판결이 실현되는 방식은 한·일 양국 간의 관계에 있어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발언이 있고 나서 닷새 뒤인 1월 23일, 외교부는 입장문을 통해 "우리 정부는 2015년 위안부 합의가 한·일 양국 정부 간의 공식 합의임을 인정함"이라며 "우리 정부는 일본에 대해 어떤 추가적인 청구도 하지 않을 방침이나, 피해 당사자들의 문제 제기를 막을 권리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음"이라고 천명했다.
문 대통령 발언과 외교문 입장문은 '속도 조절'과는 거리가 멀다. 속도 조절은 원칙과 기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숨고르기를 할 때에 적합한 표현이다. 국민적 저항을 받은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이제 와서 인정하는 것은 문재인 정권의 입장 후퇴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신년기자회견과 외교부 입장문에 뒤이어 3·1절 기념사에서마저 문 대통령이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 수는 없다'고 발언한 것은, 피해자와 국민들의 식민지배 청산 요구 그리고 일본 정부의 거친 태도 속에서 문재인 정권이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반영한다.
일본 정부가 한일관계를 경색시킨 것은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리고 한국 국민들이 그 판결을 응원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난 1월 8일 나온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위안부 배상 판결에 대해서도 반발하고 있다. 또 한국인들이 베를린시 미테구 같은 세계 각지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도 전 방위적으로 훼방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인들의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도리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3·1절 기념사에 대해서도 그런 반응을 내놓았다. 정부 대변인인 가토 가쓰노부 내각관방장관은 3월 1일 정례 브리핑에서 "중요한 것은 해결을 위해 한국이 현안에 대해 책임을 갖고 구체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라고 주문했다. 한국이 책임 있게 대응하라는 적반하장식 발언을 한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한국인들의 요구
이처럼 일본이 성의 없이 행동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태도 변화를 촉진시키는 것뿐이다. 지금 한국인들이 하는 일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과거에 발목 잡혀 있는 상태'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일본처럼 '끈질긴' 국가를 상대로 사과·배상을 받아내는 일이 정권 임기 내에 신속히 종결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다. 시간은 걸리고 있지만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금 상태를 발목 잡힌 상태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만약 일본의 요구대로 강제징용 및 위안부 판결을 없었던 일로 하게 되면, 한일관계는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가 핵심 현안이 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역사교과서나 독도 영유권 등이 많이 거론되기는 했지만 한일관계가 지금보다 평탄했던 시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그런 상황에 만족할 리 없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교과서나 독도 영유권 역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지만, 이 사안들 속에는 위안부·강제징용 문제와 결이 다소 다른 부분이 담겨 있다.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를 법정에 세우고 손해배상을 관철시킬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그것이다. 또 한국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여지도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피해자가 특정되기 힘든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정부나 극우세력은 상대적으로 부담을 적게 느끼면서 교과서나 독도에 관한 망언을 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일본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특히 교과서 문제의 경우에는, 한국 여론이 아무리 들끓는다 해도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가 타격을 입을 여지가 많지 않다. 한국이 오래도록 이 문제를 제기해왔는데도 일본 정부가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나오지 않은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서는 경제보복 카드까지 꺼내드는 일본이 예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가 핵심 의제가 되기 이전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면, 한국이 아닌 일본의 운신이 상대적으로 넓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이 과거 범죄로부터 그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발목 발언'은 일본 정부를 향했어야